[정숭호의 키워드] ‘과거사’라는 김칫독 - 파헤칠수록 퇴행과 후진만 되풀이 된다

입력 2019-03-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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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이미 지나간 슬픔으로 우리 기억의 짐을 무겁게 하지는 마십시다.” “가슴의 기억은 나쁜 기억을 지우고 좋은 기억은 과장하는 법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짐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다.” “어머니가 걸핏하면 화를 내는 주정뱅이 아버지를 수십 년 견딘 비결은 기억력이 아니라 망각력을 발달시킨 덕분이었다.”

제일 앞 문장은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 ‘템페스트’에, 두 번째는 ‘백년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의 또 다른 명편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나옵니다. 마지막은 ‘악마의 시’를 쓴 영국 작가 루슈디의 자서전 ‘조지프 앤턴’의 문장입니다.

세 문장 모두 ‘기억에 오래 붙잡히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슬프고 나쁜 기억일수록 빨리 벗어나는 게 좋다’는 거지요. 기억은 ‘과거’니까, 과거에 붙잡혀 있는 시간이 길수록 다가오는 미래를 못 볼 수 있고, 슬프고 나쁜 과거에 빠져 있을수록 원망과 미움, 복수의 마음만 깊어져 앞으로 가야 하는 발목을 붙잡는다는 말로 들립니다. 참으로 맞는 말이건만, 요즘 우리나라에는 “아니다, 아니다, 과거로 가자”며 묵은 김칫독 파헤치듯 과거의 기록을 뒤지는 사람이 여기저기 자꾸 보입니다. 걱정스럽습니다. 보도된 것만 옮겨 보겠습니다.

인천시 의회 민주당 의원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피해를 입은 월미도 주민 또는 상속인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조례안을 최근 통과시켰습니다. 문체부의 한 위원회는 동학농민운동 참가자 ‘명예 회복’을 한다며 유족 등록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1948년 10월 ‘여순 사건’ 당시 사형을 선고받고 사망한 피고인들에 대한 첫 재심 개시를 결정했습니다. 경기도 의회는 284개 일본 기업 제품에 ‘전범(戰犯) 스티커’를 붙이는 조례안을 추진했습니다. 초중고교의 교가 중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이 작사·작곡한 것은 전부 폐지하고 다시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애국가도 폐지운동의 목표에 들어가 있습니다.

▲경기도 교육청이 만든 ‘일본 전범기업 스티커’
▲경기도 교육청이 만든 ‘일본 전범기업 스티커’
참 우습고 한심합니다. ‘퇴행(退行)’과 ‘후진(後進)’이 따로 없습니다. 억지 고집이자 이기주의입니다. 6·25 전화는 전 국민이 당했는데 인천상륙작전과 관련해서만 보상하자는 게 말이 됩니까? 동학농민운동은 120년 전 일입니다. 명예회복에 필요한 사실관계는 어떻게 파악하려는지, 대한민국 수립 2개월 만에 벌어진 여순 사건 당시는 나라의 모든 게 걸음마 단계였을 텐데 재심 자료나 제대로 있나 모르겠습니다.

일본 제품에 전범 딱지를 붙이자는 것이나, 교가 폐지 운동은 이만저만이 아닌 시대착오이자 동네 똘마니들의 행패와 다름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강원도 어디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심은 나무 50만 그루를 베어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건 페이스북에서 봤습니다.) 과거만 파헤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임진왜란, 병자호란 유족들의 명예도 회복시켜야 하고, 그러다 보면 중국 정부에서 고구려 때 우리에게 당한 피해를 보상해 달라고 나서겠다”고 조롱을 보내고 있습니다.

외국의 어떤 법학자는 “사람이 만든 제도 중 가장 잘 만든 건 시효(時效) 제도”라고 말했답니다. 망각의 힘으로도 지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법으로, 제도로 잊게 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요즘의 우리나라에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효를 정했더라면 이렇게 곳곳에서 과거를 파헤치자고 나서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정부가 앞장서서 모든 것을 파헤쳐 뒤집고 있는 게 이 소동의 뿌리일 터니 지금이라도 과거사에 시효를 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씨도 안 먹힐 겁니다.

기억과 망각에 대한 문장 중 소개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인간의 권력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다.” 체코 출신 소설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에 나오는 이 말 또한 우리의 현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기억이나 슬픈 기억을 파헤쳐라, 더 쉽게 권력을 차지할 것이다’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숭호의 키워드’는 오늘이 마지막 연재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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