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발언대] 꽃양귀비에 가치를 더하는 한 끗

입력 2019-04-2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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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장

▲이용범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장
▲이용범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장
칼칼한 국물이 생각나는 환절기이다. 이럴 땐 푹 익은 김치를 넣어 팔팔 끓인 물메기탕이 절로 떠오른다. 물메기는 아주 못생긴 물고기다. 살이 너무 연해 모양을 채 갖추지 못한 탓에 옛날에는 물고기로 쳐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잡으면 바로 물에 텀벙 버리는 바람에 물텀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하지만 탕으로 끓이면 살이 부들부들한 데다 국물 맛이 담백해 자꾸 숟가락이 가게 된다. 술 마신 다음 날 한 그릇이면 속까지 시원하게 풀어줘 미식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물메기탕을 찾는다. 쓸모없다고 버려지던 못난 생선이 ‘못생겼지만 한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 덕분에 사랑받는 식재료가 된 것이다.

못생긴 물메기처럼 생각의 전환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든 사례는 농업 곳곳에 있다. 5월이 되면 얇지만 풍성한 치맛단 모양으로 활짝 피는 이 꽃은 하늘하늘 바람 따라 흔들리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다. 워낙 예쁘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이게 무슨 꽃이냐고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꽃 이름을 듣고 나면 다들 깜짝 놀란다. “이런 걸 이렇게 길에 심어도 안 잡혀가요?” 이 꽃의 이름은 ‘양귀비’. 양귀비는 현행법상 마약류로 분류돼 50송이 넘게 심으면 형사처분 대상이 된다. 물론 길가에 심어진 꽃양귀비(개양귀비)로 마약용으로 기르는 양귀비와는 다르다. 꽃양귀비에는 일반 양귀비에 들어 있는 모르핀과 코데인 등 중독,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알칼로이드 성분이 없다.

우리가 알던 꽃양귀비의 가치는 삭막한 거리 풍경을 아름답게 수놓는 ‘관상용’에 국한돼 있었다. 그런데 2017년 농촌진흥청 연구 결과를 통해 꽃양귀비에 하나의 가치가 더 추가됐다. 꽃양귀비의 잎에 항암, 항염, 항진통은 물론 항산화에도 효과가 있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꽃양귀비 이파리에 들어 있는 유익한 물질은 암세포를 억제하고 경련을 가라앉히는 켈리도닌과 항암, 소염, 관절염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프로토핀, 최면제나 진통제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크립토핀 등 18가지에 이른다. 경제성이나 효용성 등 추가적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이 같은 유용물질을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선 이번 연구를 통해 양귀비를 의약 소재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됐다.

이렇듯 숨어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가치를 발굴하고 그 가치를 실용화하는 것은 농업 연구의 장기 중 하나다. 꽃양귀비와 비슷한 사례 중에는 흰점박이꽃무지 유충(굼벵이)이나 갈색거저리 유충(고소애) 같은 식용곤충이 있다. 그동안 대다수의 나라에서 징그럽다고 외면받던 곤충은 농업 연구를 통해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미래 식량으로 거듭났다. 현재 농촌진흥청은 식용곤충을 미래 식량으로 대중화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버려지던 가축 분뇨나 부화하지 않은 달걀에 미생물을 더해 연료전지, 비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 기반을 마련한 것도 농업 연구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낮은 가지에 달린 열매는 이미 다 따먹은 상태이고, 이제 더 높은 가지에 열린 몇 개 안 되는 열매를 따기 위해 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할 때라고. 날이 갈수록 쓸 수 있는 자원이 줄어드는 지금, 쓸모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에서, 또는 여기에만 쓰는 것이라고 한정했던 것에서 숨어 있는 가치를 알아보는 눈을 키워야 할 때다. 이것이 바로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 사이에서 쓸모를 찾아내는 한 끗이다. 이 한 끗의 가치를 알고 나면 올봄에는 길에서 만나는 꽃양귀비가 더욱 예뻐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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