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식의 시사 인문학] ‘다른 소리’를 막는 집단사고의 함정

입력 2019-04-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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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칼럼니스트

중대한 사안이나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면 우리는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해결하려고 한다. 소수의 뛰어난 개인이나 전문가의 능력보다 다양성과 독립성을 지닌 집단의 지성이 훨씬 더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집단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하여 쌓은 지적 능력의 결과로 얻어진 지성을 뜻한다. 그 바탕에는 똑똑한 어느 한 사람의 지혜보다는 설령 그렇게 똑똑하지 않더라도 여럿의 지혜가 모이면 한층 더 나은 아이디어가 도출될 수 있다는 낙관적 사고가 깔려 있다.

‘집단지성’과 ‘집단사고’의 차이

집단지성은 항상 ‘개인 지성’보다 더 나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그렇다!’가 되려면 분명히 전제돼야 할 것이 있다. 집단 구성원들이 제각기 다양한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또한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다. 집단 구성원이면 누구든지 나이나 성별, 학력이나 직급 같은 건 물론이고 말 그대로 모든 ‘계급장’을 떼놓고 오로지 논의 중인 문제에 관한 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의견을 제시하는 분위기가 자유롭지 않거나 닫혀 있으면 집단지성은 싹트기 어렵다. 까딱하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비상식적 결론에 이르고 만다. 이처럼 엉뚱한 결정에 이르는 경우는 집단지성과 달리 ‘집단사고(group-think)’에 빠졌다고 말한다.

집단 소통 문제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개 응집력이 강한 집단의 구성원일수록 어느 한 방향으로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경향이 강하여 열띤 토론이나 장시간의 논쟁이 꼭 필요한 경우조차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떠한 결정을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억제한다. 심지어 구성원들이 성급하게 내린 과거의 결정을 최선이라고 확신하고 그것을 합리화하려는 경향마저 보인다고 한다. 똑똑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여러 사람이 검토, 논의하여 도달한 최종 결론이 상식적 판단력을 지닌 보통사람으로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때가 바로 이런 경우다.

한국의 회의·토론문화를 보면

전문가들의 경고에 가까운 제안에 의하면, 집단 안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결정에 대한 합리화, 지나치게 낙관적인 분위기,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확신, 집단 밖의 상이한 의견의 배척, 외부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관점의 고착화, 이런 특성이 나타나면 ‘집단사고’에 빠진 게 아닌지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리더가 발언 시간을 대부분 사용하거나, 의사결정이 대체로 만장일치로 끝나며, 회의가 토론의 장이라기보다 이미 결정된 사항을 파악하기 위해 운영되고 있다면 참석자들은 사실상 모두 집단사고에 매몰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당연히, 집단지성은 추구하고 집단사고에는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이런 자세를 견지하기는 쉽지 않다.

언뜻 보면 오늘 우리 사회에는 집단지성의 추구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가 별로 없는 듯하다. 일반 국민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을 한껏 누리고 있다. 특히 고위급 정치인이나 공직자에 대한 재판이나 정치 쟁점에 대한 집단적 의사 표현의 한 방식인 시위는 경찰이 다스리기 버거워할 만큼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토로하고 싶은 말은 얼마든지(때로는 실정법을 어기면서) 할 수 있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라고 볼 만도 하다.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그렇다.

리더의 독주와 만장일치 분위기

하지만 우리나라 거의 모든 조직, 집단의 회의나 토론 분위기는 이런 겉모습과 상당히 다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회의(會議)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의논하는 것’이고 토론(討論)은 ‘어떤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이 각각 의견을 말하며 논의하는 것’이다.

회의가 열리면 여러 사람이 모이기는 하지만 의논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토론에서도 여러 사람이 모이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 각각 자신의 의견을 기탄없이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고 논의 또한 활발히 전개되지 않는다. 즉, 회의나 토론은 단지 외형상 그런 것이고 대체로 결론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형식적 과정일 뿐이다.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이런 회의나 토론 분위기는 오늘 한국의 어느 조직, 집단이든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회의나 토론이라면 으레 활발한 논의의 장(場)이 되는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우리나라 대다수 집단에서 이루어지는 점잖고(?) 별 이견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논의 모습을 본다면 매우 의아해할 것이다.

집단지성의 발휘를 가로막는 요소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떤 요인이 우리의 회의나 토론을 껍데기뿐인 것으로 전락시키고 집단사고에 매몰되게 만드는가? 가장 큰 요인으로서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문화를 꼽을 수 있을 듯하다. 나이로든 직급으로든 간에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함부로 이견을 제시하면 안 되고’ ‘그런 행동은 당돌함을 넘은 것이고 때론 윗사람에게 일종의 도전(대듦)에 가깝게 비친다’는 통념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그러니까 중대한 정책이나 어려운 사안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여간 대담하지 않고서는 사소할망정 윗분과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이런 폐쇄적 분위기로 말하면 아마도 우리나라 대기업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그룹 총수가 의장이 되어 진행하는 회의에서 산하 기관의 장이나 임원들이 ‘다른 소리’를 내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워 보인다.

‘악마의 대변인’이 필요하다

집단사고에 제동을 거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 가끔 거론된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어떠한 인물을 성인(聖人)으로 추대할 때 적절하지 않은 인물이 추대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려고 청원인들의 반대편에 서서 의도적으로 후보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도록 한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유명한 사례로는 가톨릭이 마더 테레사 수녀의 시복(諡福)을 앞두고 무신론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히친스에게 테레사 수녀에 대한 비판을 요청했던 일이 알려져 있다. 히친스는 ‘자비를 팔다’라는 책을 통해 테레사 수녀를 혹독하게 비판한 일이 있어 ‘악마의 대변인’으로 선정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당초 가톨릭교회의 직책에서 출발한 이 발상은 이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회의나 토론이 형식적인 과정에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려고 의도적 제도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취하여 논거를 제시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게 됐다.

의아한 요직 인선, 문제성 정책의 고수

최근에 국가 요직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을 두고 논란이 컸다. 특히, 막말을 습관적으로 내뱉는 일 말고는 별다른 능력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을 장관으로, 도덕성과 전문적 역량, 어느 면에서도 기본 함량 미달인 인사를 막중한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에 임명했다.

국가정책 추진 방향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소득주도 성장론’과 ‘탈원전 정책’에 대해 대통령이 불변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이 확인됐다. 대통령에게 상이한 관점이나 반대되는 견해를 적극 제시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요직 인선이든 주요 정책이든 간에 검토, 논의과정에서 집단지성이 발휘되기는커녕 집단사고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실로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굳이 국가적 수준이 아니더라도 주요 사안들을 의논하고 최종 결론을 끌어내는 과정에서는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악마의 대변인’은 보기보다 훨씬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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