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속되는 실정으로 민생이 피폐해지자 정국은 혼란상을 보였으며, 급기야 올해 1월 국회의장인 후안 과이도가 마두로 정권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대통령을 자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과이도 정부를 승인하였다. 한국도 뒤늦게 과이도 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은 여전히 마두로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베네수엘라에는 두 개의 정부가 병존하는 기이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마두로는 과이도 세력을 탄압하려 하고, 과이도는 국민과 군에 대해 마두로 체제 전복에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아직 대규모 충돌이나 내전 상황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양측 간의 대립은 첨예화되고 있다.
미국은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있음을 공언하면서 마두로의 퇴진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특히 미국은 과이도에게 위해가 가해지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의 행보를 타국의 내정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던 중 3월 러시아가 군용기 2대에 100여 명의 군사인력을 태워 카라카스에 파견함으로써 상황은 또 다른 전기를 맞았다. 물론 이것은 마두로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고, 표면상 베네수엘라가 러시아로부터 구매한 S-300 방공체계를 정비한다는 이유였다. 베네수엘라의 S-300은 대규모 정전사태 와중에서 고장을 일으킨 바 있다. 베네수엘라 입장에서는 외부의 군사 개입에 대비하여 방공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자를 파견함으로써 대처할 수 있는 일을 두고 러시아가 군사인력을 파견한 것은 특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러시아가 미국의 전통적 영향권인 미주 대륙에 군사인력을 파견하는 일은 이례적이다. 무모하게 비칠 수도 있는 움직임이다. 이에 미국은 러시아에 베네수엘라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미·러 간 대결이 심화되는 가운데, 러시아의 궁극적인 목표와 게임플랜에 대한 다양한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우선 러시아의 이러한 움직임은 2015년 9월 러시아의 시리아 파병을 상기시킨다. 당시 시리아에서는 정부군과 반군 그리고 테러집단인 이슬람국가(IS)가 물고 물리는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과 서유럽 국가는 시리아 내 IS세력에 대해 공습을 가하고 있었다. 전황은 점차 정부군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러자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의 요청을 근거로 군대를 보내 공습을 개시하였다. 명분은 IS를 척결한다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반군도 공습 대상이었다. 러시아의 공습에 힘입어 시리아 정부군은 전세 역전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 시리아 전황은 정부군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러시아는 베네수엘라에서 시리아에서와 같은 결말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시리아와 베네수엘라의 사정이 너무 다르다. 시리아는 애당초 중동 지역에서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분류되던 곳이다. 시리아에 러시아의 유일한 해외 해군기지가 있을 정도이다. 미국도 시리아가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시리아에서 미군이 공습작전을 한다는 사실이 러시아에는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러시아가 뒤늦게나마 파병하고 공습을 시작했다 해도 미국이 이를 저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뒷마당이라고 할 미주 대륙에 있다. 이 지역에도 쿠바나 베네수엘라처럼 반미적인 정부가 존재할 수는 있으나, 여기에 러시아가 군을 보내 개입을 하고, 이를 미국이 용인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역사적으로 러시아가 미주 대륙에 군사 개입을 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그것이 바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이다. 당시 소련은 쿠바에 미국을 겨냥하는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고 하였는데, 미국은 이를 좌절시킨 바 있다. 물론 그 후에도 쿠바 카스트로 정부의 반미 친소 정책은 지속되었으나, 소련의 군사적 개입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런데 쿠바 미사일 위기가 마무리된 경위를 살펴보면, 러시아가 베네수엘라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무엇을 겨냥하려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해소되기까지 미국과 소련은 막후에서 치열한 교섭을 하였다. 그 결과 소련은 미국의 요구대로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대신 미국은 소련의 요구에 따라 터키에 있던 미국의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또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쿠바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기 얼마 전, 쿠바 망명자들이 미국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아 쿠바 침공을 기도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소련은 미사일을 배치함으로써 쿠바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미국이 불침 약속을 하였으므로 소련으로서는 미사일 철수를 합리화할 수 있었다.
만일 이 모델이 푸틴 대통령의 구상 속에 있다면, 러시아는 베네수엘라에서 군사적 개입 수위를 일정 수준으로 높여 긴장을 조성한 후, 미국과 협상하여 주고받기 식으로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할 소지가 있다. 우선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터키 배치 미국 미사일을 철수시킨 것과 유사한 미국 측의 양보를 겨냥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마두로 정부의 존립을 추구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 분석가들은 푸틴이 베네수엘라에서의 군사 개입을 카드로 미국으로 하여금 우크라이나에서 모종의 양보를 하도록 거래하려는 심산이라고 해석한다.
그럴 법한 해석이다. 하지만 그대로 될지는 불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첫째로 마두로 정부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카스트로 정부의 국내 위상은 확고하였다. 그러나 마두로 정권의 장래는 불투명하다. 물론 지난달 과이도가 호소한 마두로 정권 전복 캠페인이 군의 호응 부족으로 실패로 돌아가기는 하였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정치 경제 난국과 미국이 공공연히 추진하고 있는 마두로 퇴진 노력의 강도를 감안하면, 마두로 정권이 오래 가지 못할 개연성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로는 소련 시대보다 러시아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금의 러시아가 그런 큰 거래를 밀고 갈 수 있을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셋째로 미국이 이미 기울어져가는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의 장래와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의 행동의 자유를 거래하려고 할지도 의문이다.
합리적 추론이 이렇다면 러시아의 베네수엘라 개입의 출구전략이 무엇일지는 여전히 난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러시아가 병력을 보냄으로써 베네수엘라의 군이나 민심이 급속히 마두로 정권으로부터 이탈하지 못하도록 막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마두로 정부가 무너지고 과이도가 정권을 잡게 되면 러시아는 남미 대륙에서 유일한 우방을 잃게 되고 경제적으로도 손실을 보게 될 것이며, 군사적 개입 시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수 있다.
푸틴은 시리아에서 군사적 개입을 통해 아사드 정권을 구해낸 바 있다. 과거 흐루시초프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마무리하면서 미국의 일정한 양보를 얻어내었다. 과연 푸틴이 베네수엘라에서 벌이는 이례적인 개입 움직임이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노르웨이의 중재로 마두로와 과이도 간의 대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일단 이 추이를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주러시아 대사,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