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조의 생각] 코드인사·블랙리스트의 함정

입력 2019-06-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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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교수

정부의 경제정책은 서민들의 삶을 점점 더 힘들게 만들고, 대북정책은 국민을 분열시킬 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야당도 정책 대안은 제시하지 않고 비판과 성토만 하고 있어 답답하다.

자유한국당이 최근 ‘2020 경제대전환위원회’를 구성해서 정부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성장과 고용, 복지 등에 관한 정책 대안을 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황교안 대표는 소설가 이문열 씨를 만나 ‘진정한 보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정책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고 각계 인사를 만나서 아이디어를 경청하는 것은 지난 2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좋은 출발이다. 이 자리에서 이문열 씨는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 사건이 문화계의 기울어진 헤게모니를 바로잡겠다는 인식에서 출발했겠지만 방법과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야당이 세워야 할 정책 대안의 방향을 보여준 좋은 지적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며 10년간 강화된 진보적 정책들에 대한 반동으로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진 보수적 정부는 상당한 정책 수정과 보완이 필요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정책 수정의 필요성을 너무나도 절실하게 느낀 나머지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진보적 인사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싶은 유혹과 함정에 빠지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의 지지로 출발한 문재인 정부도 문화계 공공기관에 코드인사를 하고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었다. 살아 있는 권력이 수사를 받는다는 것은 더 많은 블랙리스트 의혹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현상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문제 되어 왔지만, 문재인 정부의 핵심 지지자들로만 구성된 화이트리스트 또는 코드인사는 더욱 심각하다.

코드인사는 국가를 망하게 하는 첩경이다. 오늘날 베네수엘라 위기의 원인을 반복된 코드인사에서 찾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74년 정권을 잡은 페레스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 각료들을 중앙은행 이사회에 포진시킴으로써 중앙은행을 정치화했다. 중앙은행 장악은 무분별한 정부 지출로 인한 국가부채 증가와 통화팽창 정책을 무제한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페레스에 이어 정권을 잡은 차베스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대법관으로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대법관 해임을 가능하게 하는 법 개정으로 사법부까지 정치화했다. 코드인사는 사회주의 정책을 집행해 저소득층에 각종 복지 혜택을 쏟아 붓는 데 효율적이었지만, 권력층의 부패와 경제의 구조적 부실을 초래했다. 교육과 혁신 및 경제성장을 통한 구조적 불평등 해결이 없는 한, 복지를 통한 단기적 불평등 완화 정책은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1970년대 말 남미 최고의 석유 부국이었던 베네주엘라는 극빈층이 국민의 87%를 차지하는 빈국, 파산 직전의 나라로 전락했다.

블랙리스트와 코드인사는 정부 예산을 집행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가성비 낮고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특히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정부의 재정적 후원의 취지를 의심케 할 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문화상품의 대중소비와 시장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돈이나 권력에 의한 후원으로 생산된 예술이 많았다. 교회의 후원은 화려하고 장엄한 중세 예술을 낳았지만, 유럽인들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구속하고 경제사회적 암흑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은 유럽 르네상스 예술과 과학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가문의 고리대금업을 미화하고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술 및 학문의 자유는 후원자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보면, 국가 예산 규모가 커지면서 예술과 학문에 대한 재정 후원도 늘어나고 동시에 블랙리스트나 코드인사의 유혹도 커졌다. 사실 르네상스 이후 인쇄술이 널리 보급되고 문화의 대중소비가 늘면서, 저작권(著作權)이 후원자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를 보장해주는 근대법 제도로 도입되었다. 예술인 또는 지식인들이 이제 더 이상 후원자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자신의 저작권을 가지고 시장에서 보상받고 대중의 수요에 더욱 충실할 수 있게 됐다. 저작권과 시장이라는 법제도가 잘 운영된다면, 예술가과 지식인들은 소비자라는 후원자 이외에는 그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을 필요가 없다. 정부가 문화계에 대한 재정 후원을 한다면, 문화시장의 공정한 관리 및 활성화에 그치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정부가 문화의 생산에 직접 개입하려고 하는 순간 블랙리스트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권력은 짧고 무상하다. 어설픈 후원자로 군림하려 하지 말고, 진정한 후원자 국민의 뜻을 살펴야 한다. 우리 후원자들은 대한민국의 예술, 경제, 안보 모두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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