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여성기업’이 난립하면서 ‘공공기관 의무구매 제도’가 왜곡되고 있다. 정부가 공공기관에 중소기업 제품 구입을 의무화하자 여성기업을 가장한 유통회사들이 난립하면서 선의의 피해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기업보다 진입장벽이 상당히 낮은 ‘여성기업’은 공공기관이 가짜 장부를 작성하게 하는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본지가 지난달 7일 찾은 서울시 노원구 수락산역 부근에 위치한 H유통업체. 이 업체는 법인 등기에는 주로 사무용품이나 각종 홍보 물품을 납품하는 도매상으로 분류됐다. 직원 30~40명이 근무하는 이 회사는 2017년 말 기준 2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온라인 마켓만 운영하는 것에 비하면 꽤 덩치가 있는 중소기업이다.
남성이 대표이사인 H사는 2015년 6월, 이곳 사무실 5층의 법인 한 곳을 분리해 이름을 Y사로 변경한 후 대표이사에 여성을 등록했다. 동시에 한국여성경제인협회로부터 ‘여성기업 확인서’를 받았다. Y사는 등기상으로는 H사와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H사의 대표이사는 Y사의 사외이사로 있다. 홈페이지도 통합해 운영한다. 하나의 몸통인 셈이다.
H사는 이런 식으로 ‘여성기업’의 가면을 쓰고 준정부기관인 주택금융공사, 공무원연금공단, 국민건강보험공단 등과 거래했다. 적게는 300만 원, 많으면 5000만 원에 육박하는 금액이 오갔다. 물론 이 업체는 사무용품을 비롯해 보조배터리, 핸드크림, 잡화 등 직접 생산한 제품이 아닌 일반제품을 유통해 공급했다. 공사는 ‘홍보 물품’ 명목으로 주로 이 업체와 거래했다.
이들과 거래한 내역은 고스란히 공공기관의 ‘여성기업 구매 실적’으로 잡혔다. 그런데 여성기업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직접 생산한 물건이 아니면 실적에 잡아선 안 된다. 이는 경영평가에 들어가는 항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론 직접 생산하는 제품이 없는 유통업체 Y사는 공공기관에 ‘제품을 직접 생산한 형태’로 납품했다. Y사는 ‘포장지’만 만들어 직접 생산한 것처럼 둔갑시켰다. 가령 A업체에서 문구류, B업체에서 미니가습기, C업체에서 보조배터리, D업체에서 핸드크림 등을 납품받아 Y사 이름으로 패키지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물건이 된다. 혹은 이들 물건을 모아 홍보 물품에 적합하도록 라벨을 붙인다. 직접 제작한 물건은 없지만, 겉으론 직접 만든 물건으로 포장되는 것이다. 무늬만 여성기업인 유통업체 H사가 여성기업 인증을 받아 준정부기관과 거래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최근 H(Y)사는 여성기업임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마케팅으로도 활용 중이다. H사 관계자는 “모아서 포장하는 건 있어도 직접 생산하는 물건은 없다”라고 말했다. 중소벤처기업부 관계자는 “패키지로 판매하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사례”라며 “직접 생산한 게 아니라면 실적에 올려선 안 되고, 만약 올렸다면 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