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호의 고미술을 찾아서] 순백의 아름다움, 조선의 아름다움으로

입력 2019-07-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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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평론가, 전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몽골제국이 등장하고 동서양 간의 문물 교류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던 14세기 초, 도자문화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비단을 대신해서 도자기가 인기 교역품으로 떠오르면서 채식(彩飾)자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당시 중국 도자기는 청자와 백자를 중심으로 발전해 기술적으로 최정점에 와 있었고, 다양한 기형(器形)에 음각이나 양각과 같은 장식기법이 성행하던 때였다. 그 시대 사람들은 옥과 같은 도자기의 표면은 아름다움 그 자체여서 그 위에다 붓으로 그림이나 문양을 그리는 따위의 장식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동서양을 아우르는 대제국의 건설로 세상은 넓어졌고 교역은 확대되고 있었다. 교역에는 상대가 있어 수요자의 취향이 제품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이슬람과 유럽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런 꾸밈없는 그릇 표면이 너무 밋밋하게 보였던지 뭔가 색다른 장식을 요구했던 것 같다. 그 요구에 부응하듯 중앙아시아 옥사스(Oxus)강 지역에서 산출되는 청색 안료가 중국에 들어오고 그것으로 도자기의 표면을 장식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도공들에겐 옥 같은 표면에 끈적끈적한 칠을 한다는 것이 너무 속(俗)된 것이어서 불쾌감마저 들었겠지만, 세상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고 ‘도자의 변’이라고 불릴 만한 채식자기, 즉 청화백자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 무렵 고려는 비색 상감청자의 여성(餘盛)이 이어지는 가운데 백자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기술적으로 청자 못지않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쉽게도 남아 있는 고려백자가 너무 소량이어서 양식적·조형적 특징을 살피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한편 원나라 때 시작된 채식기법은 계속 발전하여 명나라 선덕(宣德) 연간(1425∼1435)에 청화의 발색과 문양이 뛰어난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된다. 그런 흐름은 바로 조선에 전해져 한반도에서 중국 못지않는 양질의 청화백자가 만들어지는 것이 15세기 중후반이니 약간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명나라 청화백자와는 미감의 결을 달리하며 고유색을 분명하게 들어낸다. 절제된 기형에다 시문(施文)에서는 여백의 미를 추구했고 거기에 한민족 본연의 미감과 생명력이 더해졌다. 비교컨대, 기교가 가득 들어간 그릇의 표면을 숨 막힐 듯이 각종 문양으로 꽉 채운 명나라 청화백자가 공예적 아름다움이라면 조선의 그것은 회화적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청화안료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어서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채식이 없는 순백자로의 무게 추 이동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순백자는 안료를 마음껏 쓸 수 없는 현실적 제약을 넘어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의 절제정신과 버무려짐으로써 검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도자문화로 발전한다.

그 후 조선의 도자산업은 왜란과 호란으로 극도의 침체기를 겪지만, 17세기 후반 들어 그 충격에서 벗어나 사회가 안정되면서 제 위치를 찾기 시작한다. 영·정조 시대에 청화백자는 문기(文氣) 짙은 조선의 아름다움으로 거듭났고, 순백자는 순백자대로 순백의 미감을 창조적으로 계승했다. 순백의 아름다움이 민족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체화(體化)되고 그 정점에서 달항아리와 같은 특별한 도자문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족 아닌 사족이다. 우리 도자미술사에서 달항아리는 아름다움 너머의 아름다움으로 존재한다. 그 순백의 피부와 넉넉한 몸체,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의 이면에는 조선 도공들의 땀과 고뇌가 서려 있다. 그들의 무심한 손끝에서 창조된 경이로운 조형은 미의 화두(話頭)가 되고 법문(法門)이 되어 우리를 적멸의 아름다움으로 인도한다. 그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원초적 탐닉 때문일까, 달항아리로 유명한 원로 도예가의 전시장에서 백옥의 항아리 표면을 청화로 칠갑한 작품을 보며 몸서리쳤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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