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지금] 마크롱 뜨고, 메르켈 지고

입력 2019-07-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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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행정부 수반과 중앙은행장 인선이 도대체 왜 연계될까?

유럽연합(EU)을 5년간 이끌 주요 기관의 수장이 결정된 과정을 보면서 떠오른 질문이다. 독일 국방장관 출신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16일 과반보다 겨우 9표를 더 얻어 가까스로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최초의 여성 행정부 수반임에도 턱걸이로 통과한 것은 유럽의회 내 각 정파의 셈법이 복잡했고 신임 위원장의 역량보다 선출 과정에 대한 의회의 반감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지난 2일 EU 회원국 수반 모임인 유럽이사회는 격론 끝에 집행위원장에 폰데어라이엔, 단일 화폐 유로존 중앙은행인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에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추천했다. 두 사람 모두 유럽에서, 특히 라가르드 총재의 경우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능력 있는 인사다. 그러나 또 다른 공통점은 두 사람이 이 직책 후보로 거명된 적이 없었고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유럽의회는 2014년 선거 때 최고후보를 집행위원장으로 임명하는 데 성공했다. 의원내각제처럼 의회 내 각 정파가 행정부 수반이 될 인물을 선출하고(최고 혹은 대표후보), 이 후보가 공약을 내걸고 선거운동을 벌였다. 유권자들의 유럽의회 선거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직선 기구로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한다는 이유에서다. 의회는 이번에도 자신들이 추천한 최고후보 중 한 명이 집행위원장이 돼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허사였다.

지난달에 두 번, 그리고 이달 2일까지 인선을 매듭 짓기 위한 유럽이사회가 세 번이나 열렸다. 핵심 쟁점은 최고후보를 집행위원장으로 임명하는가 여부.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자국 출신의 만프레트 베버 최고후보를 집행위원장으로 지지했다. 중도우파의 같은 정당 출신에 독일 내 여론도 최고후보가 유럽의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중도파 정당을 이끌며 세력 확대에 일등공신이 된 마크롱 대통령은 거세게 반대했다.

그는 우선 유럽이사회가 유럽의회 선거 결과를 고려, 집행위원장을 추천하고 의회가 이를 승인한다는 조약에 근거해 의회의 최고후보제를 반대했다. 또 메르켈이 지지한 베버가 행정 경험도 없다며 거부했다. 이후 마크롱은 스페인의 산체스 총리 등 마음이 맞는 지도자들과 긴밀한 사전 조율을 거쳐 독일이나 다른 회원국들이 반대할 수 없는 인물을 추천했다. 그게 바로 폰데어라이엔과 라가르드다. 전혀 다른 기구의 수장이지만 두 사람이 한 묶음으로 추천됐다. 결국 이번 인선은 반대에 그치지 않고 다른 회원국들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검증된 행정부 수반과 중앙은행장을 한 세트로 제시한 마크롱의 압승이었다. 두 사람 모두 EU의 개혁을 지지하고 풍부한 정치 경험을 보유했다. 반대로 불가피하게 수세적 입장에서 자국 후보를 지지한 메르켈은 완패했다. 지난해 12월 집권당 당수 자리를 내주고 총리에 재직 중인 메르켈은 이번 인선과정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사실상 레임덕에 처했다는 우려를 자아냈다.

이번 인선은 앞으로 EU가 국제 정치경제에서 수행할 역할과 긴밀하게 연관됐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2차 세계대전 후 다자주의적 자유무역 질서 구축에 핵심 역할을 한 미국이 이 질서를 앞장서 파괴 중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수정주의 세력이 돼 기존 국제 질서 흔들기에 한창이다. 이런 와중에 세계 최대의 지역블록 EU는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질서 유지에 안간힘을 써왔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2050년까지 유럽을 탄소중립적인 최초의 대륙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파리 기후변화 협약에서 탈퇴한 미국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자유무역도 마찬가지다. EU는 지난달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과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을 발표했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EU는 일본, 베트남과 FTA를 체결했고 현재 호주 및 뉴질랜드와 이를 협상 중이다.

EU가 이처럼 국제 질서의 유지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왔지만 리더십 강화는 쉽지 않다. 그동안 프랑스와 독일은 유럽 통합의 기관차로서 통합의 강화에 기여해왔으나 이번 인선에서 드러난 균열을 봉합해야 한다. 여기에 집행위원장의 리더십이 더해져 시너지를 발휘해야 한다. 힘겹게 임명된 신임 집행위원장은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 등 여러 정파로 파편화된 유럽의회와 상대해야 한다. 앞으로 유럽의회에서 법안 비준에 필요한 안정적 과반 확보가 더 어렵고 시간도 더 걸릴 것이다. 다자주의 자유무역 질서는 와해 중이고 과감한 정책 결정이 필요할 때가 종종 있다. EU는 그렇지 못하다. 그나마 이번 인선과정이 그런대로 매듭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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