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등장한 세계화는 ‘세계는 평평하다’는 아이디어로 세계 경제를 이끌었다. 특히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자청하면서 그로 인한 떡고물을 전 세계가 나눠 먹었다.
세계화가 가져다주는 풍요가 끝나가고 있다는 인식이 최근 들어 퍼지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촉발한 무역 전쟁으로 세계화의 상징 메커니즘인 공급망 체인이 흔들리고 있다는 이유다.
지난 4월 맥킨지가 발표한 아시아 공급망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기업 절반 이상이 공급망 이동을 고려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10%는 이미 공급망 변경에 착수한 상태다. 또한 글로벌 무역 자체도 2017년 5.5%에서 2019년 2.1%로 절반 넘게 감소했다. 지난해 국경 너머 투자도 20%나 줄었다.
그러나 블룸버그통신은 세계화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선, 세계화의 매개체가 변했다. 1950년대 세계화를 촉진한 게 컨테이너라면 지금은 데이터가 컨테이너 역할을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다. 3D 프린팅이나 자동화 공장 등 새 제조기술은 역외 생산의 유인을 감소시킨다고 블룸버그는 지적했다.
또한 세계화의 실체에 대한 접근도 달리할 필요가 있다. 블룸버그는 물리적인 상품 자체만 보면 세계화가 둔화하고 있다고 봤다. 그러나 이는 디지털 경제의 폭발이라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디지털 경제는 무역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평가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최신곡을 스트리밍해서 듣는다면 CD가 국경을 넘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이건 세계화가 느려지고 있는 게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다.
셋째로 무역을 측정하는 기존 방식이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블룸버그는 지적했다. 과거에는 상품이 항구를 떠날 때 그 양을 가지고 상품 이동을 측정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 나라를 통해 들어온 부품으로 하나의 상품을 만든다. 이는 무역과 경제관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측정이 필요함을 보여준다고 블룸버그는 강조했다.
할 바리안 구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산 운영시스템을 탑재하고 아시아에서 조립된 스마트폰의 실제 가치를 반영하면 미국의 무역적자는 5000억 달러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큰 그림을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트럼프가 2500억 달러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고 추가로 3000억 달러 규모 관세를 매길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1930년대 이래 자유무역이 최대 위협에 놓였지만 그건 전체 그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블룸버그는 꼬집었다.
유럽연합(EU)과 다른 주요 경제국들은 관세와 장벽을 낮추는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EU와 일본의 무역협정은 올초 시행에 들어갔다. 유럽과 캐나다의 무역협정도 지난해 시행됐다. 일본과 다른 10개국 태평양 국가들은 점진적·포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나아갔다.
다시 말해서, 트럼프가 무역장벽을 세우고 있지만 나머지 국가들은 서로 그 장벽을 낮추고 있다는 것이다.
또, 중국의 무역장벽 제거 역사는 길다는 지적이다. 트럼프 관세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다른 국가들에게 자동차 같은 상품 관련 관세를 낮추는 것이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에 따르면 2018년 초 중국은 평균 수입품에 8% 관세를 물렸다. 지금은 미국 기업에 부과한 비율이 20%를 넘는다. 다른 국가는 7% 아래로 떨어졌다.
블룸버그는 미국과 중국이 주고받는 보복 관세가 단기적으로 세계 무역의 둔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화의 역사는 깊고 생명력은 길다고 강조한다. 트럼프가 상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