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미숙의 참견] 기술독립, 정부출연연 R&R(역할과 책임) 다할 기회

입력 2019-08-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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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숙 동의대학교 신소재공학부 초빙교수

일본 정부가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수출심사 우대국)로 지정했던 한국을 제외하기로 2일 각의에서 의결함으로써 한일관계가 경제전쟁이라 할 만큼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백색국가란 일본이 안보상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전략물자 수출 시 통관절차 간소화 혜택을 주는 우호국으로, 여기서 제외되면 모든 전략물자 품목에 대해 개별 수출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절차와 규제가 적용된다. 비(非)백색국가로 분류될 경우 첨단소재, 전자, 통신, 센서, 항법장치 등 1100여 개 품목이 규제 대상이 되며, 한국의 경우 평판디스플레이 제조용기를 포함한 총 767개 품목이 영향받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전략물자관리원, KOSTI).

이에 앞서 지난달 4일부터 일본 정부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포토 레지스트, 에칭가스 등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3개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를 시행함으로써 우리 주력산업인 반도체 산업체는 이미 이들 소재 확보에 초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25년 전에 이미 일본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경고해 왔던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김광선 교수는 이 위기를 기회로 기술독립에 예산과 시간을 투자해 국가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도체 공정은 소자를 제조하는 핵심공정인 전(前)공정과 이송·페킹 등을 포함하는 후(後)공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의 전공정 국산화율은 25%, 후공정은 65% 정도이다. 기술독립을 위해서는 적어도 전공정 과정에서 65% 정도의 국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핵심 설계 및 제조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 반도체 산업체는 일본, 미국, 독일 등의 반도체 제조 장비를 사용해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크게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초기 투자 시 해외 반도체 제조장비를 투입하였고, 장비에 사용되는 부품·소재들도 자연스럽게 외국의 제품을 사용해 온 탓이다. 소재나 부품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공정라인 전체를 바꾸어야 하므로 기술경쟁력뿐만 아니라 많은 예산과 시간이 소요되는데, 일본이 이러한 한국 산업체의 약점을 공격한 것이다.

왜 이런 상황에 이를 때까지 부품·소재의 개발과 국산화가 늦어진 것일까? 대기업이 국산화된 부품·소재를 실제 공정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서류 및 스펙 검토를 거치고 생산 공정 라인에서 테스트를 해야 한다. 여기에 수백억 원의 예산과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데,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이러한 과정을 대기업이 부담하여 실제 공정 라인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또한, 중소기업도 부품·소재를 국산화하려면 투자 대비 수익이 커야 하며 시장 규모와 경쟁력, 원가절감 효과 등을 고려해야 한다. 대학과 연구소의 기초원천기술이 효율적으로 기술개발로 이어지지 못한 점도 이유 중 하나이다. 국산화에 전력투구해 개발에 성공하였지만 시장경쟁력이 낮아 결국 사장될 수 있다는 우려도 물론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기술독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상태이다.

기술독립에는 인력, 예산,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또한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이 확보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반도체를 포함한 부품·소재 분야에서는 많은 고급 인력을 양성해 왔기 때문에 국산화에 필요한 기술인력은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부는 일본 수출규제 대응책으로 반도체 소재를 비롯한 부품·장비 개발에 2020년부터 10년간 매년 1조 원씩을, 일반 소재·부품·장비의 경우 2021년부터 6년간 5조 원을 투입하기로 하는 등 기술독립을 위한 투자에 적극적 의지를 나타내고 있어 예산 확보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갑작스런 대폭 예산 투자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주도하여 진행된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13만 명의 인력과 20억 달러(현재 기준 30조 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된 예를 보면 기술자립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한 인력과 예산 투자 규모에 대한 고민은 잠시 미뤄 두어도 좋을 듯하다. 단, 인력과 예산을 효율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출연연에 오래 몸담았던 필자는 지금이야말로 정부출연연이 국가와 국민이 필요로 하는 전략 소재·부품 및 장비의 국산화에 그 몫을 다하여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 확보’라는 설립 목적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학·연·관 협업의 중심에서 출연연이 인력을 모으고, 세부 전략을 마련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예산을 효율적으로 투입하고 기초연구를 기술개발로 연결하여 기술독립을 체계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기술 로드맵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학과 연구소, 중소기업과 대기업, 그리고 정부가 진정성 있는 협업으로 어려운 상황을 효율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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