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고향의 노래를 부르는 까닭

입력 2019-09-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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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나는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가곡 부르는 걸 퍽이나 좋아했다. 또래들이 유행가나 팝송에 빠질 때 나는 꿋꿋하게 가곡만을 불렀다. 가곡을 잘 부르는 사람을 부러워했으나 아무리 불러도 음정과 박자를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나는 되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부르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토록 우리 가곡을 좋아했을까?

나는 늘 가곡의 아름다운 선율에 감탄했다. 가곡은 소란스러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든다. 마음이 고요 속에 있을 때 고통은 견딜 만해지고, 가곡 선율은 느른한 마음을 쇄신하는 계기를 주었다. 마음은 파릇해졌고, 온몸엔 생동하는 기운으로 충만했다. 또한 가곡을 부를 때 저 너머의 삶에 대한 동경으로 아득해졌다. 저 너머 세상에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꿈의 세상이 있을 듯했다.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서정주 ‘꽃밭의 독백-사소단장’ 전문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라고 한 시인은 썼다. 세상의 많은 것들 중에서 노래는 좋은 것에 속한다. 사는 일이 늘 야박한 희망 속에서 기대와 보람이 좌절되어 시난고난하더라도 노래는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 같이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 중 하나다. 돌이켜보면 삶은 얼마나 자주 우리 꿈과 희망을 배반했던가! 사는 게 기쁨보다는 고단함이,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아 늘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우리는 견뎌왔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빛이 들고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노래 속에는 시름 많은 마음의 주름을 펴고 삶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그 무엇이 들어 있다. 노래를 부르는 마음과 꽃 앞에서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하고 주문하는 마음은 한마음일 것이다.

가곡의 곡조와 가사는 마음에 흘러들어와 나를 흔들었다. 가만히 새겨들으면 우리 가곡에는 우리를 기른 토양, 우리 얼과 넋의 바탕이 되었을 흙과 바람, 햇살과 초목들이 들어 있다. 즐겨 부른 가곡을 한자리에 모으고 살펴보니, 우리 삶과 정서의 바탕인 고향과 고향을 떠난 자의 향수를 노래한 게 단연코 으뜸으로 많았다. 그밖엔 사랑, 이별, 님, 그리움, 정한을 다룬 노래들이 뒤를 따른다.

20세기를 살았던 수많은 한국인들은 식민지, 전쟁, 분단, 산업화를 겪는 동안 불가피하게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다. 오랫동안 가난 속에서 신음하던 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탈향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비바람 치는 근대 역사를 헤쳐온 한반도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저 만주 벌판으로, 러시아 동토로, 낯설고 물선 저 태평양 건너 신대륙으로 떠났다. 십여 년 전 비행기를 여러 번 바꿔 타고 쿠바를 방문했을 때, 한 세기 전 고향을 떠나 그 먼 데까지 떠밀려온 한국인 노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어서 모국어조차 잊어 말을 더듬었다. 고향을 떠난 자들은 모유 수유를 강제로 하지 못하게 된 아이와 같이 모국어와 고향의 기억 같은 가장 큰 정서적 자산을 잃은 채 객지를 떠돌며 삶의 버거움에 허덕인다.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작사를 하고 홍난파가 작곡한 ‘고향의 봄’만큼 널리 사랑받는 노래는 없다. 감정이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메말랐을 때 이 노래를 부르면 가슴이 울컥해졌다.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고 아름다운 이 가곡은 겨레의 노래다. 그만큼 우리 얼과 정서가 담긴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바람에 하느작이는 수양버들, 고샅길 담 넘어 피는 복사꽃과 살구꽃, 오랜 우물과 대숲, 구릉이 있는 고향의 정경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는 영혼 깊은 곳을 울린다. 고향을 오랫동안 떠나 먼 곳을 떠돌 때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리 영혼은 고향 산천의 순연함을 닮는다.

눈앞에 삼삼하게 떠오르는 고향의 정경은 세월이 흘러도 퇴색할 줄 모른다. 우리의 고향은 봄마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천지를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꽃 피는 산골”이고,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다. 우리 산천 어디에나 흔한 마을의 정경이다. 고향에서 지낸 어린 시절은 정서적 충만감과 나날의 보람으로 가득 찬 삶의 시간이었다. 은하수가 흐르는 여름밤 하늘엔 얼마나 많은 별들이 우리 머리 위에서 쏟아질 듯 떠 있었던가! 가을밤엔 대숲이 사운거렸고, 어둠 속에서 야생 짐승들이 먹잇감을 노리며 돌아다녔다. 마을의 개들은 바람 소리에 공연히 컹컹 짖어댔다. 우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우주적 질서가 가지런한 낙원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한참 멀어진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잃어버린 게 행복이란 걸 깨달았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온 이래 수도 없이 불렀을 이 노래는 여전히 내 정서의 한 부분을 떠받치고 있다. 이 노래를 부를 때 내 안의 허영과 탐욕이 씻겨 내려가며 정화되는 듯한 기분으로 아득해진다. 아마도 그게 노래의 힘이 아닐까. 나는 온갖 통계 수치를 들이대며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정치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대신에 소박한 말로 우리가 잊은 것들을 되살려내는 노래에 담긴 진실을 더 믿는다. 좋은 노래는 거짓과 허언에서 벗어나 진실만을 오롯하게 전달한다.

또 다른 기억에 남을 만한 고향의 노래는 한양대학교를 설립하고 총장을 지낸 교육자이자 작곡자였던 김연준이 시를 쓰고 곡을 붙인 ‘청산에 살리라’다. 근대 도시와 견주자면 “수풀 우거진 청산”은 세속의 명리와 동떨어진 청정 지역이다. 고요한 시절의 삶이 있고, 이웃 간에 인정이 넘치는 살기 좋은 땅이다. 땅에 씨앗을 뿌리고 그것을 거둔 수확물로 살림을 꾸린다. 이웃에게 손해가 될 만큼 제 잇속을 넘치게 추구하지 않으며, 남의 불행을 내 행복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자연과 사람이 평화롭게 어우러져 사는 이곳은 누구나 꿈꾸는 낙토(樂土)이다. “이봄도 산허리엔 초록 빛 물들었네/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 살으리라” 누군들 번뇌와 시름없는 삶을 꿈꾸지 않으랴.

“청산”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살기 좋은 땅이 있으리라는 상상, 혹은 낙원사상이 빚어낸 산물이다. 동양의 낙원사상이 빚어낸 이상향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무릉도원은 서양의 유토피아에 견줄 만한 이상향이다. ‘무릉’의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었다. 배에서 내려 동굴을 따라가다 어느 복사꽃이 피어 만발한 낯선 마을로 들어섰다. 어부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선경(仙境) 속에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광경을 보고 넋을 잃었다. 이 오래된 신화를 바탕으로 도연명은 ‘도화원기’라는 시를 썼다.

‘청산에 살리라’의 바탕에 깔린 것은 자연 회귀의 철학이다. 자연은 자연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타락에서 벗어나 올바른 삶으로 나아가는 윤리적 실현의 바탕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삶이 곤핍할수록 우리가 자연을 그리워하며 동경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청산”은 세속의 번뇌와 시름 따위는 다 잊고 밭 갈고 씨 뿌리며 자식들을 키우며 평화롭게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누릴 만한 이상향이다. 푸른색은 지평선이나 마을에서 먼 산을 물들인다. “청산”의 푸름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곳 중에서 가장 먼 곳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품은 색으로 이곳이 현실 저 너머의 세상임을 암시한다. 늘 푸름에 젖은 “청산”에 살다 보면 내 마음도 어느덧 푸르러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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