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1956년 효봉 스님의 제자로 출가했으며, 2010년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무소유’, ‘맑고 향기롭게’, ‘산방한담’, ‘오두막 편지’, ‘버리고 떠나기’ 등 스님이 쓴 책이 많은 독자에게 감명과 울림을 전했다.
대원각을 시주한 김영한도 그렇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 시주를 결심했다. 건물 40여 채와 대지 2만3140㎡로, 시가 1000억 원이 넘는 규모였다.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김영한과 무소유가 삶의 철학인 법정 스님 사이에 권유와 거절이 10년 가까이 이어졌다. 결국 법정 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이고, 2년 동안 개ㆍ보수를 거쳐 길상사가 탄생했다. 길상사가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말사인 점이 재미있다. 전남 순천 송광사의 말사가 어떻게 서울에 있을까? 말사는 지역과 상관이 없고, 법정 스님이 송광사 소속이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의 흔적은 길상사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진영각에 있다. 전각에는 스님의 영정과 친필 원고, 유언장 등이 전시된다. 법정 스님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준비하지 말며, 승복을 입은 채로 다비하라”고 유언했다. 유골은 진영각 오른편 담장 아래 모셨다. 진영각 옆에는 생전에 스님이 줄곧 앉은 나무 의자가 흔적을 대신한다.
김영한은 기생 교육기관이자 조합인 권번에 들어 수업을 받고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입문했다. 1950년대 청암장이라는 별장을 사들여 운영하기 시작한 대원각은 군사독재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영한은 대원각을 시주할 때 “그까짓 1000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며 한 치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백석은 그가 사랑한 시인 백석이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줄 정도로 사랑했다. 하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고 백석은 만주로 떠났다. 두 사람의 만남은 여기까지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이 나뉘며 서로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백석은 1996년 북한에서, 김영한은 1999년 길상사 길상헌에서 눈감았다.
길상헌 뒤편에는 시주길상화공덕비가 있다. 길상화는 길상사 창건 법회 때 법정 스님이 염주와 함께 전해준 법명이다. 공덕비 옆 안내판에 김영한의 생애와 백석의 시 한 편이 새겨졌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내가 죽거든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유골을 길상사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이제 길상사를 천천히 둘러보자. ‘삼각산길상사’ 현판을 내건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경내다. 걸어 올라가다 보면 ‘관음보살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가 종교 간 화해와 화합을 염원하며 기증했다. 창건 법회 때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했고, 석가탄신일과 성탄절에는 서로 축하 현수막을 내건다.
길상사 경내는 울창하지 않아도 숲의 느낌이 제법 진하고, 잘 가꾼 정원을 보는 듯하다. 보호수를 비롯한 고목이 많고, 철 따라 들꽃이 피고 진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 불교 서적과 일반 서적을 갖춘 길상사도서관을 만들었다. 2016년 새롭게 단장해 북카페 ‘다라니다원’으로 운영된다.
길상사에서 내려가면 선잠단지를 지나 큰길 건너편으로 서울 성북동 최순우 가옥(등록문화재 268호)이 있다.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 혜곡 최순우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저자로 유명하다. 앞마당에는 소나무, 모란, 산사나무 등이 있고 사랑방과 안방, 대청, 건넌방이 ‘ㄱ자형’으로 이어진다. 사랑방 위에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현판이 걸렸다. 문을 닫으면 이곳이 곧 깊은 산중이라는 뜻이다. 건물 뒤편에는 선생이 쓴 책이 놓인 돌 탁자와 장독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