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 사태가 11년 만에 다시 심판대에 오른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 재조사를 약속한 지 1년여 만이다. 배임을 주장하며 권고안 거부를 예고한 은행들이 “고민하겠다”며 한발 물러서고 있어, 타협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20일 관련 업계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은행들 의견 수렴을 거쳐 이르면 이번 주 중 키코 배상비율 안을 확정하고 수일 내 분쟁조정위원회를 열 계획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애초 종합국감(21일) 직후 분조위를 열 계획이었지만, 점검해야 할 부분이 있어 최종 결정을 미루고 있다”며 “분조위 일정은 마지막 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분쟁 조정 대상은 남화통상과 원글로벌미디어, 일성하이스코, 재영솔루텍 등 4개 업체로, 피해 금액은 총 1500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키코 때문에 30억~800억 원의 피해를 봤지만, 분쟁 조정이나 소송 등을 거치지 않아 이번 분조위 대상이 됐다.
키코는 환율이 일정 범위에서 변동하면 미리 정한 환율에 외화를 팔 수 있는 파생금융 상품이다. 환 헤지를 위해 수출 중소기업들이 대거 가입했다가, 2008년 외환위기로 원ㆍ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큰 피해를 봤다. 당시 대부분의 피해기업은 ‘사기상품’을 주장하며 소송을 걸었지만, 대법원은 “설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라며 사실상 은행 손을 들어줬다.
금감원이 들여다보는 건 불완전판매 가능성이다. 당시 은행들이 키코를 판매하면서 상품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피해액의 20~30%를 배상하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이 경우 은행이 부담할 배상액은 300억~450억 원으로 추산된다.
핵심은 은행의 수용 여부다. 분조위 결정은 권고이기 때문에, 당사자(은행)가 거부하면 강제할 방법이 없다. 이에 금감원은 수용률을 높이기 위해 ‘은행↔피해기업’ 간극을 좁히는 데 집중했다. 상반기 열릴 예정이었던 분조위가 차일피일 미뤄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몇 달 전까지 "대법원 판결까지 난 걸 분조위에 상정하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며 반발했던 은행들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윤 원장 역시 최근 국감에서 “은행과 키코 피해기업 사이 합의가 상당 부분 진행됐다”고 언급했다.
이번 조정에서 합의가 이뤄지면, 다른 피해기업들의 분쟁 조정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분쟁조정을 신청한 4개 기업처럼 앞서 소송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기업은 150곳에 달한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감원은 나머지 기업들의 분쟁조정 신청을 받아 은행에 자율 조정을 의뢰할 것”이라며 “다른 기업들도 이번 4개 기업에 적용한 분쟁조정안에 준해서 처리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