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놀랄 만한 일들이 벌어진 후 우리가 본 마지막 장면은 10월 5일 북미 실무회담 북측 대표인 김명길이 스톡홀름에 있는 북한 대사관 앞에서 동료가 들고 있는 손전등 빛 아래서 엄숙한 표정으로 성명문을 읽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물이 깨끗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제거될 때에라야 가능하다’고 했다. 귀를 의심케 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을 저해하는 장애물들이 깨끗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제거된 상태에서 사는 나라는 없다. 거기다가 ‘발전’까지 추가했다. 안전뿐 아니라 발전도 보장하라는 것이다. 이게 진정 북한이 내세우는 조건이라면 협상을 통한 비핵화는 물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 같다. 그렇다면 그동안 미국 대통령이 말한 ‘좋은 소식’이란 무슨 말이었을까.
지금 미국의 정치 상황은 유동적이다. 그렇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가능성은 아직 높지 않다. 공화당 의원들이 그를 버릴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년 대선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직까지는 야당 복이 있는 것 같다. 민주당이 분열되어 있는 데다 선두권에 있는 대선 후보들 가운데 당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인물이 아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전망은 불투명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반면에 북한은 꽤 느긋해 보인다. 지난 6월 이란이 미국의 정찰기를 격추시켰을 때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을 보고 북한은 미국이 북한 핵문제 때문에 군사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한 것 같다. 제재에도 불구하고 경제 사정도 나쁘지 않다. 중국과의 관계도 잘 다져놓아서 급하면 구원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은 급한 쪽은 성과에 목마른 트럼프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 북한은 배짱을 부리고 미국은 조르는 듯한 징후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 국내에는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엄격한 비핵화 조건을 접고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는 정도로 타협함으로써 제재 완화와 북미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면 나쁠 것이 없다는 의견이 있다. 그렇게 해서 상황이 전전되고 그것이 발판이 되어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비핵화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 상황도 가능하다. 북한 핵 프로그램의 전체 목록은 제쳐두고 영변 핵시설만을 폐기한 대가로 제재를 완화해주면 나머지 핵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북한은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사실상의 핵 보유국이 되고 비핵화는 영영 물거품이 된다.
요즘 이란 핵 합의에 계속 파열음이 일고 있다. 이란 핵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졌다. 물리력을 쓰지 않고 협상을 통해 핵 문제를 해결한 선례로 본 것이다. 이란 핵 문제의 원인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혁명으로 이란에 신정 체제가 들어섰다. 그 후 물라(이슬람교의 법과 교리에 대해 정통한 사람)들은 이란 국민들의 동의 절차 없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주권재민의 원칙을 어긴 독재정부이다. 독재정부는 영원한 정통성 위기를 겪게 되어 있고 이를 덮기 위해 끊임없이 위기를 재생산해내야 한다. 핵 개발 게임은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북한의 핵 개발도 이와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다. 30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비핵화 협상은 현상 유지도 못하고 뒷걸음질을 쳐왔다. 북한이 핵무기를 계속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사정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기 어렵다. 지금의 형국으로 봐서는 오히려 미국이 일을 더 그르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이 시점에서 다시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 본다. 북한 체제의 질적 변화 없이 협상을 통한 비핵화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국제사회는 북한의 체제 변화를 시도할 의사뿐 아니라 능력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