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가 지난달 세계 3000여 기업을 분석해 발표한 ‘젠더 보고서’에서 한국 기업 이사회의 여성 비율(3.1%)은 조사 대상 40개국 중 꼴찌였다. 전체 평균 20.6%에 턱없이 못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2015년만 해도 파키스탄(2.2%)이나 일본(3.4%)보다 여성 임원비율이 높았던 한국(3.9%)이지만 몇 년 만에 파키스탄(5.5%), 일본(5.7%)이 달려나가는 사이 맨 뒤로 처졌다.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는 더 가관이다. 국내 상장기업 2072곳 중 1407곳(68%)은 여성 임원이 단 한 명도 없다.
여성 임원이 적은 이유는 여성의 승진 기회를 가로막는 사회적 인식, 산업구조 등 각종 유리천장도 원인이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로 승진할 만한 여성 인재 풀(pool)이 부족해서다. 출산과 육아를 겪는 30~40대 한국 여성들이 일과 가정의 양립을 실현하지 못하고 일을 포기하는 ‘경력단절여성’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35~39세, 40~44세 여성 고용률은 각각 59.2%, 62.2%로 ‘30-50클럽’ 7개국 중 최저다. 1위인 독일과는 약 20%포인트 격차가 날 정도다.(한국경제연구원, 2018년 기준)
현 정부가 여성 장관 30%, 공공기관 여성 임원 의무화, 3년 내 여성 고위 공무원 10% 달성 등 다양한 여성 고용 촉진책을 펴고 있는 만큼 기업들도 이 같은 시대 흐름에 맞춰 여성 인재 육성에 나서야 한다.
기업으로서는 무엇보다 여성 임원 확대가 사업 성장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경영진의 성(젠더) 다양성과 성 형평성이 높을수록 성과가 높다는 연구결과는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등 여러 곳에서 많이 나와 있다. 여성이 고위직에 진출할수록 다양성이 확보되고, 공정하게 평가되며, 기업 문화가 유연해져 조직의 생산성과 창의성이 확대된다는 내용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지난해 한국 방문 때 “노동 시장의 성차별을 해소하면 한국 GDP가 10%는 증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일찍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리먼브러더스 사태’에 대해 ‘리먼브러더스’가 아닌 ‘리먼시스터즈’였다면 경제위기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라며 여성의 능력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여성경제활동인구를 늘리고 경단녀를 다시 사회로 돌아오게 하고 여성 임원을 더 뽑자는 주장이 아무리 난무해도 실제 사회 인식과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하면 공염불에 그칠 뿐이다.
우리도 많은 선진국들이 도입하고 있는 여성 고용 할당 제도 도입을 고려할 만하다. 노르웨이는 여성 고용 할당률이 40%로 가장 높고 영국도 현재 27%인 대기업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을 2020년까지 33%로 올린다는 목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최초로 여성 임원 의무 할당제 도입 법안을 2018년 통과시켰다. 심지어 일본, 인도에서조차 ‘여성활약추진법’, ‘여성할당제’ 등을 통해 여성 인력 활용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최고경영자들이 유능한 여성 리더들을 육성하고 활용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가이드라인과 성공사례를 공유하는 기업 문화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높은 이유다.
개봉 한 달도 되지 않아 관람객 300만을 돌파하며 공감대를 확산하고 있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한 김도영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82년생 김지영’이 사람들이 1도 공감하지 못하는, 전래동화 같은 얘기가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이 둔화되는 위기 상황에 아직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는 여성 인력이 우리 경제의 ‘히든카드’”라는 인식이 현실화한다면, 여성 경제활동의 최대 걸림돌인 육아 문제가 공동체 차원에서 해결된다면,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hy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