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희망퇴직’ 역설…뱅커·고객 ‘고난의 행군’

입력 2020-01-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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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커들의 인생 2막 ‘그림의 떡’...고령층 ‘금융 불평등’ 심화 우려

#지난해 퇴직을 한 시중은행 지점장 정모 씨는 은행 선배의 권유로 친환경 농산물 직거래 사업에 뛰어들었다. 경기도 지역에 수백 평의 땅을 사들여 농지를 가꿔 직접 농산물을 재배해 직거래하는 사업이다. 입소문을 타고 사업이 재미를 보고 있다. 지난해 퇴직한 또 다른 은행원은 퇴직금을 전부 투자해 강원도 인근에서 펜션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부터 14일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 신한은행을 포함해 연말·연초 은행권에서 약 2000명이 짐을 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올해 명퇴자들은 예년처럼 인생 2막을 설계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올해 퇴직을 신청한 이모 씨는 “선배들이 하던 대로 했다가는 승산이 없을 것 같아 다양한 방법을 고려하고 있지만, 퇴직금이 얼마 안 돼 새로운 일을 찾기란 제한적인 상황”이라며 “당장 쉴 수가 없어 당분간 예전 거래처였던 중소기업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대규모 희망퇴직은 장기적으로 은행의 인건비 절감과 조직 효율화로 이어질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상당한 비용이 든다. 퇴직금에 더해 수십 개월치의 특별퇴직금을 준비해야 하고, 자녀학자금 지원, 재취업지원금, 건강검진비 등 각종 복리후생비를 한 번에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은행은 2015~2018년 희망퇴직을 포함한 해고·희망퇴직급여로 연평균 9592억 원을 지출했다. 여기에 일반 퇴직금을 더하면 금액은 더 커진다.

거액의 특별퇴직금은 은행들 수익성 악화에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희망퇴직금으로 4대 은행 중 가장 많은 2682억 원을 지출했다. 그 결과 1년간 지켰던 ‘리딩뱅크’ 자리를 신한은행에 빼앗겼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과거에는 특별퇴직금을 주고서라도 인력구조 조정이 급선무였는데 앞으로 은행들의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특별퇴직금까지 줄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중은행은 비대면 거래가 증가함에 따라 영업점을 대폭 정리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상반기 모바일을 활용한 인터넷뱅킹 거래 비중은 53.2%를 기록, 처음으로 50% 선을 넘었다. 고객의 발길이 끊기면서 영업점과 운영·관리 비용이 드는 현금자동입출금기가 대폭 줄어들고 있다.

KB국민·신한·우리·KEB하나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은 이달 말까지 총 85개 점포를 통폐합한다. KB국민은행이 이달 7일과 20일 각각 1개, 37개 등 38개 점포를 정리할 예정이다. KEB하나은행도 이달 18개의 점포를 통폐합하기로 했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은 각각 3개와 4개 점포를 통폐합할 것으로 알려졌다. 4대 시중은행 국내 점포 수는 2015년 3924개에서 2016년 3757개, 2017년 3575개, 2018년 3563개로 감소 추세다. 올해 1분기에는 3460여 개로 줄게 된다.

시중은행은 비대면 영업 확대에 따른 지점 축소에 대응하기 위해 거점 지점을 중심으로 묶어 관리하고 있다. 지역별 거점 점포를 중심으로 중소형 지점이 하나의 그룹을 형성, 협업과 연계영업을 통해 점포 효용을 높여 불필요 지출을 최소화하겠다는 취지다. 영업점이 줄면서 일할 수 있는 인력도 함께 줄어 40대 차·과장급부터 명퇴 압박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은행 때문에 은행원들은 명퇴 압박에 시달린다. 고통의 결과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비대면 서비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취약계층들의 금융정보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 영업점이 줄면서 창구를 찾는 인원 쏠림 현상으로 업무 처리가 늦어질 수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영업점이 줄면서 비대면 서비스에 약한 고령층과 취약계층의 금융 불평등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며 “줄어든 영업점으로 고객들이 몰리면서 대기 시간이 크게 늘어나는 등 일반 고객들에게까지 피해가 확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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