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지금] 폴란드와 러시아의 역사전쟁

입력 2020-01-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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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팅 안쌤의유로톡 운영자

“1938년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는 독일 히틀러가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강제 합병한 것을 용인해 나치와 담합했다. 러시아는 영국 및 프랑스와 반나치 동맹을 결성하려 했는데 양국의 유화정책 때문에 할 수 없이 나치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자국이 2차 세계대전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위와 같이 정면으로 반박했다. 1938년 9월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를 만나 합의안을 도출해 냈다. 나치는 그해 독일인이 주로 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슐레지엔) 지역을 강압해 독일령으로 만들었다. 체임벌린 총리는 더 이상 유럽의 질서를 교란하지 않겠다는 히틀러의 말만 믿고 이 합병을 인정했다. 이 합의는 뮌헨협정이라 불린다. 이 협정은 독재자의 야욕을 더 키워 결과적으로 매우 참혹한 전쟁을 야기했다고 비판받는다.

그런데 푸틴은 서방의 이런 유화정책을 비판하며 자국이 히틀러와 맺은 불가침조약(몰로토프-리벤트롭 조약, 양국 외무장관의 이름을 땀)을 옹호했다. 1939년 8월 23일 히틀러와 스탈린은 비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양국이 상대국을 침략하지 않고, 독일의 폴란드 침략을 용인하며 소련도 폴란드 절반과 발트 3국을 점령하기로 합의하였다. 그해 9월 1일 독일이 여명에 폴란드를 침공해 2차 대전이 시작됐다. 이때 히틀러와 스탈린이 합의한 동유럽의 세력권이 2차 대전 종전 후에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전후 동유럽이 소련의 압제에 들어간 이유다. 1980년대 말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유럽의 시민들은 평화적인 시민혁명(루마니아 차우셰스쿠를 제거한 유혈혁명 제외)에 동참해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동유럽에 이 불가침조약은 2차 대전 때 수백만 명의 죽음, 뒤이어 40년이 넘는 소련 주도 공산독재의 압제를 야기한 원흉이다. 그런데 러시아 대통령이 영국과 프랑스가 무책임했다며 정작 자국의 막중한 역사적 책임을 회피했다.

이번 역사전쟁의 발단은 지난해 9월 중순 유럽의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이었다. 이 결의안은 2차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을 나치와 소련의 불가침조약 때문이라며 유럽연합(EU) 회원국에 “전체주의 공산독재와 나치 정권이 저지른 범죄와 침략행위를 명확하고 원칙 있게 평가하라”고 촉구했다. 푸틴은 세 달이 지나 군지휘관 회의에 참석해 이를 정면 반박했다.

나치와 소련의 침략에서 가장 큰 희생을 당한 폴란드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지난달 말 폴란드 외무부는 자국 주재 러시아 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2차 대전은 나치와 소련의 조약으로 시작됐고 60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홀로코스트)당했음을 상기시켰다. 폴란드 정부는 푸틴 대통령이 자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며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폴란드와 러시아의 역사전쟁에 가해자 독일도 폴란드와 서방 편에 가담했다. 폴란드 주재 롤프 니케 독일대사는 “독소 불가침조약은 나치의 폴란드 침략을 준비하는 데 이용되었다. 소련은 나치와 함께 폴란드의 야만적인 분할에 참여했다”며 트윗을 날렸다.

폴란드는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라 종종 러시아와 역사전쟁을 벌여 왔다. 지난 23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거행된 홀로코스트센터 추모기념식에 폴란드 안드레이 두다 대통령이 불참했다. 두다 대통령은 러시아 대통령에게 연설 기회를 주고 자신에게는 주지 않았다는 불참 이유를 댔다. 여기에서도 독일의 책임 인정은 주목할 만하다. 독일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연설에서 홀로코스트 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독일은 “아직 역사의 교훈을 충분하게 배우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는 최근 독일에서 반유대주의 정서가 확산됨을 언급했다.

올해는 2차 대전 종전 75주년이다. 러시아에서 2차 대전은 ‘위대한 애국전쟁’으로 불린다. 러시아는 나치가 항복한 5월 9일을 전승기념일로 지정해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대규모 행사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꽤 규모가 클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2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숨진 이 전쟁에서 자국의 희생과 위대함을 강조한다. 러시아는 1990년대 초 냉전 붕괴 후 2차 대전 발발의 책임과 폴란드에 대한 탄압 등을 일부 인정했다. 그러나 푸틴의 장기집권이 계속되면서 역사 재해석에 열중한다. 국제무대에서 대접받는 위대한 러시아의 복귀를 위해 역사 왜곡도 서슴지 않는다. 폴란드뿐만이 아니라 가해자 독일도 러시아의 역사왜곡에 일침을 놓는다. 역사전쟁은 비단 유럽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러나 유럽의 역사전쟁은 동북아시아에서 이제까지 벌어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역사전쟁과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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