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어릴 적 무심결에 내게 그러더라고요. '아빠, 왜 나를 소재로 한 만화는 없어?'라고. 그래서 '모두 어디로 갔을까?'를 쓰게 됐죠. 딸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보면, 나이를 먹어서도 '아빠가 나를 이만큼 사랑했구나' 생각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이름보다 '둘리 아빠'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김수정(69) 작가. 만화가 아닌 동화책 '모두 어디로 갔을까?"로 돌아온 그와의 첫 대화는 딸에 관한 것이었다. 오십 넘어 늦둥이 딸을 본 '딸바보'.
"딸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제 만화를 열독하기 시작했어요. 딸이 태어나기 전에 나온 만화라서 딸이 볼 때는 옛날 만화일 텐데도 보면서 무척 좋아했고요. 급기야 딸이기 전에 제 팬이 됐죠. 그러다가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무심결에 한 소리가 7년간의 세월을 거쳐 책으로 나오게 됐어요."
김수정 작가가 최근 출간한 '모두 어디로 갔을까?'는 시작부터 딸의 영향이 컸다.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딸의 초등학교 4학년 당시 모습을 모델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딸의 주변 인물도 모두 책 속에 등장시켰다.
책 속에서 딸의 흔적은 단번에 찾아볼 수 있다.
"세라의 한국 이름은 '시하'이듯이. 시하는 한자로 '時夏'라고 써요. 추운 겨울에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늘 따뜻하게 살라고 아빠가 이름에 '여름 하'자를 넣었데요. 캐나다에 온 지는 2년이 조금 넘었고요. 처음엔 말도 잘 안 통하고 외국 아이들이랑 생각도 달라서 힘든 게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공부도 같이하며 잘 지내고 있답니다. 물론 사이가 안 좋은 친구도 있지만요. '마야' 같은 애요." (모두 어디로 갔을까? 1권 94페이지)
'모두 어디로 갔을까?'는 이처럼 세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풀어져 간다. 세라는 바로 딸을 모델로 한 주인공이다. 책에서 세라의 친구들로 에린, 소피, 아리나가 등장하는데, 모두 실존하는 딸의 친구들이 모델이다.
"딸이 어릴 때 캐나다로 와서 낯선 땅에서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했던 것을 아빠가 알고 공감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어요. 성격도 동화 속 세라와 실제 세라랑 비슷하죠. 호기심도 많고, 어른스러운 점도 있고, 친구들과 의리도 있고, 고집도 있죠. 그런 특징을 녹여내려고 했어요. 작품 속에서 세라의 독백 같은 대사도 실제로 딸이 말한 것들을 토대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확장한 것이죠."
책을 본 딸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때(초등학교 4학년 때)보다는 지금은 성숙해져서, 만일 당시로 돌아간다면 마야(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와의 관계도 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리고 이걸 영문판으로 출간하면 번역 작업을 본인이 하고 싶대요.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딸이 영어도 잘하고 에세이쪽으로 재능이 있어서 작가가 되라고 꼬시고 있는데, 딸은 작가와 의사 중에서 진로를 고민하고 있어서 걱정이에요. 그리고 제가 책의 마지막에 (딸을 위한) 퍼즐을 남겨놨어요. 바로 릴리와 토마스의 관계죠. 3권 말미에 릴리의 남편이 토마스였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딸이 작가가 되어 완성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모두 어디로 갔을까?는 요정 시리즈 첫 작품"
김수정 작가가 쓴 동화책 '모두 어디로 갔을까?'는 그가 구상 중인 '요정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그는 '요정 시리즈'를 3부작으로 구상해 이야기를 풀어갈 생각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나무가 핵심이었어요. 숲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와 함께 그 이면엔 자연보호 같은 내용을 담았죠. 다음 작품에서는 바다와 물의 이야기를, 마지막에는 죽음을 이야기해서 요정 시리즈를 마무리하고 싶어요."
동화책이라는 이름을 빌렸지만, 김수정 작가는 아이들이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래도 그는 이 책이 가족들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책이 되길 희망했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가 동화책이지만 세 권이라 부담도 되고, 요새 아이들은 책을 볼 만큼 여유도 없잖아요. 책은 훈련이 돼야 읽어요. 요새는 엄마가 아이들에게 책이 아무리 재밌다고 읽어보라고 해도 안 읽죠. 그래서 이 책을 기획할 때도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아이들이 읽을 수 있게끔 글을 읽으면서 만화가 연상되도록 했고, 캐릭터가 따라올 수 있게끔 했죠. 그동안 우리나라 동화를 보면 삽화와 글이 따로 논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글과 삽화가 매칭되도록 애를 많이 썼어요. 책을 읽는 독자분들은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들도 전반부 3분의 1만 읽으면 계속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게 했어요. 글만 계속 읽으면 지루한 만큼 중간중간 그림을 통해 스토리를 연상할 수 있도록 했죠. 그림이 눈에 들어오고 캐릭터가 연계되면 책을 끝까지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거든요. 사실 표지와 제목만 보더라도 일반적인 동화책과는 차이가 있을 거예요. 단순히 아이들만 보는 동화책이 아닌 온 가족이 같이 볼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했거든요. 아이들이 지금 이 책을 안 읽더라도 커서라도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아이가 커서 자신의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그런 책이 됐으면 해요."
◇7~8개 출판사 거절 수모도…"차라리 내가 직접 하자"
이 책이 독자 앞에 펼쳐지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책을 출간하려면 출판사를 잡아야 하는데,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가 나오질 않았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설립한 '둘리나라'를 통해 출판업에 직접 뛰어들었다.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안 찍어주더군요. 7~8곳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했어요. (웃음) 사실 제가 생각해도 일반 출판사에서는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준비부터 시작해서 책이 나오기까지 7년이 걸렸는데, 출판사에서 만일 저랑 계약했다면 그 7년간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만일 판매도 잘 안 되면 손해가 클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결국 둘리나라에 출판업을 추가해서 책을 냈습니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가 서점에서 판매된지 한 달. 그는 아직은 자신의 팬들이 나서 책을 구입해 준 것 같다고 옅게 웃었다.
"이게 만화 같으면 자신 있게 '이런 만화를 냈으니 많이 봐주세요'라고 하겠는데, 그런 자신은 없어요. 책을 쓰며 나름대로 느낀 건 독자들에게 그래도 실망시켜드릴 정도는 아니라는 거죠. 읽어보시면 적어도 실망하진 않을 거예요. 특히 처음 읽을 때와 두 번 읽을 때, 분명히 작가가 고심하면서 숨겨놓았던 그런 장치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읽다 보면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봐 주세요."
◇한국 만화 캐릭터 산업 연 김수정…"웹툰 캐릭터 소모 아쉬워"
김수정 작가는 1980~1990년대 둘리 캐릭터를 통해 국내에 '캐릭터 산업'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킨 인물이다. 사실 당시만 하더라도 둘리만큼 히트한 캐릭터가 없었다. 국내 만화 시장이 워낙 암흑기였기도 했다.
'아기공룡 둘리'는 1983년 4월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런 둘리의 인기에 기업들도 주목했다.
하지만, 둘리가 성공적인 캐릭터 사업으로 이어진 것은 김수정 작가의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둘리가 태어난 것은 37년 됐지만, 구상한 기간까지 생각하면 올해로 40년이 됐어요. 사실 둘리 캐릭터는 까다로운 만화 심의 규정을 피하려고 사람이 아닌 캐릭터를 생각하고, 그중에서도 남다른 동물을 생각하다 보니 공룡까지 가게 된거죠. 둘리 캐릭터를 만들고 3년 동안 스토리 구성을 위해 아껴놨어요. 사실 미국은 디즈니 캐릭터로 시장을 선점했고, 일본은 (도라에몽ㆍ아톰 등) 다양한 캐릭터의 등장으로 관련 산업이 활성화됐지만, 한국은 뒤처진 상황이었죠. 하지만, 둘리는 국내 캐릭터 산업에서 뭔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탄생한 둘리 캐릭터는 '국민 캐릭터'로 불릴 정도로 화제를 불러왔다. 1985년 출시된 롯데삼강 '둘리바'는 하루에 17만 박스씩 팔아치우고도 모자라 품귀 현상을 빚었다. 요새라면 '허니버터칩'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 문구류에서는 동아연필이 둘리 캐릭터를 사용하면서 시장 점유율을 크게 늘렸다. 그리고 태어난지 37년이 지난 현재도 꾸준한 캐릭터 수입을 올리고 있다.
김수정 작가는 최근 국내 만화 산업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전했다. 국내 만화 산업이 웹툰을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스타 웹툰작가는 계속 나오고 있지만, 대중적인 캐릭터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
"어떤 분들은 웹툰은 만화가 아니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전엔 잡지나 책으로 만화가 유통됐지만, 이제는 인터넷이나 포털사이트 등 웹으로 유통되는 거죠. 보는 방식이 바뀐 거지 만화는 다 같은 만화에요. 그런데 문제는 웹으로 보는 데서 단순히 끝난다는 거죠. 이게 웹툰도 오프라인에서 책으로 나와서 소장할 수도 있어야 대중적인 캐릭터가 나올 수 있다고 봐요. 소장을 해야 그 가치가 길게 갈 수 있거든요. 웹툰 캐릭터가 인형이나 열쇠고리로 잘 나오지 않잖아요? 웹툰을 보다 보면 대중적인 캐릭터가 될만한 게 있는데, 모든 것이 웹툰으로 소모되어 끝나니 너무나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