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들 정신 차리시오.”
국정감사를 나온 국회의원들에게 은행 임원이 이렇게 호통을 쳤다는 일화는 지금도 금융가에서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 경제수석이 만나자는 요청이 인사청탁임을 직감한 은행장은 사표를 안 주머니에 넣고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직감이 사실임을 직면하자 “그런 식으로 대통령을 모시면 아니됩니다”는 말로 청탁을 거부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오른손을 잃은 장애인으로 업무 능력이 특출했던 부장을 임원으로 승진시키고, 상고 출신의 부장을 이사의 자리로 올렸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철학을 인사 현장에서 철저하게 시행했다.
원로 금융인 성암(星巖) 이우영(李愚榮) 선생이 펴낸 자신의 회고록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온 흙수저 인생’의 내용 일부다.
올해 85세의 성암 선생은 1936년 경북 상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1129일간의 경인남침전쟁(6·25) 기간에 청소년기를 보내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배워야만 산다’는 의지로만 어려운 처지에서도 학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일어난 전쟁에서 경북 상주는 인민군치하의 땅이 됐고, 어느 날 하굣길에 인민군으로 오인돼 공군의 습격을 받기도 한다.
고등학교는 대구로, 대학은 서울로 진학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 신입 행원 모집에 합격해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성실함을 인정받아 부총재 자리에 올랐고, 국책은행인 중소기업은행장으로 발탁된다. 은행장 임기 6개월을 남기고 새로 발족한 중소기업청 초대 청장이란 중임을 맡게 된다.
성암 선생은 공직생활 중 ‘애국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한국은행의 한 사람, 과장으로 오일쇼크와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부도위기에 몰린 대한민국을 구한 일은 그가 기억하는 인생의 강렬한 한 페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