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고위직의 성 다양성 개선이 ‘진정한 사업의 기회’라며 이에 선도적으로 동참하였다. 그동안 변방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성들을 중심에 올려놓기 시작한 것이다. 작년 9월 16일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23차 세계금융연수기관 총회(WCBI:World Conference of Banking and Institutes)의 주제는 ‘혼돈의 시대에 지속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어떤 변화와 노력을 모색해야 하는가’였다. 여기에서 다뤄진 이슈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기후변화로 온갖 재난이 지구촌을 휩쓸어 이를 늦추지 않으면 인류 멸망을 재촉할 수 있으나 각국 정부는 경제성장에 매달려 이에 대한 전 지구적 대응에 진전이 없다. 따라서 금융업이 지속가능하려면 기후변화 방지를 위한 기술개발 기업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금융업의 성장이 지속되려면 ‘성 다양성의 개선’이 필수라는 것이다. 나는 50여 개국 600여 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성 평등(Gender Equality)’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내가 강연자로 초대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리천장이 가장 두꺼운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결혼퇴직 각서’ 제도로 출발부터 여성에게 불리했던 한국 금융계에서, 내가 외국계 금융회사를 선택해야만 했던 이유와 함께 수십 년간 금융업에 종사하면서 지켜본 여성 금융인의 고난사가 내 강연의 주 내용이었다. 선진국인 한국의 현실이 의외라는 반응과 함께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 회의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성 평등’이라는 이슈가 ‘행동과 문화(Conduct and Culture)’라는 주제 아래 다뤄진다는 점이었다. 여성할당제와 같은 법 제정보다 ‘행동과 문화의 정착’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하나의 문화가 형성되려면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적이고 집합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지난 수십 년간 금융권은 ‘자신을 혹사하여 조직에 충성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성공을 위해 과로를 요구하는 남성적인 업무방식에 더 많은 찬사와 가치를 부여해 왔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기업들에서는 ‘성공’이라는 개념을 달리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기업을 위해 자신을 혹사하는 사람보다는 좀 더 다양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선호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에게 아주 유리한 환경이다.
고백건대, 내가 외국계 금융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잠재적 차별을 받고 있는 주위의 여성 동료들을 알면서도 ‘관찰과 무시’의 접근방법으로 그들을 따돌렸다. 내 일만 열심히 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여성으로서 유일한 비즈니스 리더였던 나는 성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업적·경제적으로도 인지하지 못했고, 또 이를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두 딸의 미래 직장이 내가 근무하던 시절보다 훨씬 더 험한 경기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열정적으로 금융권의 여성들이 더 높게 올라갈 수 있도록 멘토링을 하고 있다. 아직도 대기업의 여성 임원 비중을 보면, 우리 회사는 성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토크니즘(tokenism)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현재 소위 ‘여왕벌’로 군림하는 여성들이 과거의 나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칸과 아카데미 등 세계 최고의 영화상을 휩쓴 ‘기생충’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아미(ARMY·방탄소년단 팬클럽)를 이끌며 K-팝을 전파하는 BTS처럼, 스마트폰과 반도체로 첨단산업을 선도하는 삼성전자처럼, 이제 우리나라도 여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금융 분야는 아직도 저개발 국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금융산업도 성 다양성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금융강국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