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알렉산드로 노박 러시아 에너지부 장관은 이날 “러시아가 산유량을 단기적으로는 일일 20~30만 배럴 더 늘릴 수 있으며, 향후에는 최대 일일 50만 배럴 증산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는 사우디의 증산 예고를 맞받아친 것이다. 앞서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현재 하루 평균 970만 배럴인 산유량을 4월 1230만 배럴로 늘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사우디에 이어 러시아까지 증산을 강행한다면 미국에 이어 세계 2·3위 산유국들의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가뜩이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원유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우려되는 상황에서 갈등이 벼랑끝으로 치닫고 있다. 만약 양측의 증산 경쟁까지 현실화된다면 유가의 폭락은 물론, 글로벌 주식과 채권시장에도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들의 전쟁은 지난 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플러스(+) 장관급 회의에서 감산 논의가 틀어지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OPEC 맹주인 사우디는 감산 확대를 주장했지만, 러시아가 반기를 들면서 합의가 불발됐다. 그러자 사우디는 유가를 지지하려던 이전의 시도에서 공세적인 전략으로 돌아섰다. 3월 말 감산 시한이 끝나는 대로 산유량을 늘리는 한편, 4월 선적분 주요 원유 수출 가격을 전격 인하하기로 한 것이다. 이 영향으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가 약 30년 만에 최대 폭락을 겪는 등 전날 국제유가는 수직 낙하했다.
이러한 싸움이 예견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일반적으로 산유국들은 가격이 오를 때에는 결속이 쉽지만, 하락 국면에서는 입장 차가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닛케이는 “코로나19라는 비상사태로 석유 카르텔 간 이해 대립이 표면화했다”고 진단했다.
사우디는 현재 추진 중인 ‘탈(脫)석유 경제구조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줄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금은 석유 판매 수입에서 나온다. 저유가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이에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저유가 국면에 대비해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자 증산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분석이다.
반면 러시아는 생산 단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유가가 하락한다고 해도 비교적 타격이 크지 않다. 하지만 추가 감산을 하게 되면 원유 수출을 통해 얻는 수입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또 감산에 나서지 않고 유가 하락을 감수하면서 미국 셰일유 업계를 견제하려는 속내도 있다. 채굴 기술이 향상됐다고 하더라도 셰일유는 여전히 기존 원유보다 생산 단가가 높다. 저유가가 형성되면 생산단가가 높은 미국의 셰일산업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닛케이는 과거 고유가 국면에서 적립한 재정자금이 러시아가 증산에 나설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재무부는 배럴당 25~30달러 수준의 저유가가 지속되더라도 향후 6~10년간 대응 가능하다고 밝혔다.
다만 일각에서는 양측이 치킨게임을 그만두고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에너지부 장관은 이날 자국 국영TV와의 인터뷰에서 “(협상의) 문이 닫히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며 “4월 이후로 OPEC 회원국 및 비OPEC 산유국들의 감산 협정이 연장되지 않은 것이 우리가 더는 협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