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의 원견명찰(遠見明察)] 길을 걸으며 - ①길을 나서다

입력 2020-04-1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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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일렉트릭 사장

스페인의 2000년 된 ‘산티아고 가는 길’을 완주하기 위해 나는 두 번 길을 나서야 했다. 처음의 출발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두 번째 출발을 목마르게 기다렸고 완주의 마지막 코스에서는 힘듦을 잊고 그저 행복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걸었던 전주의 ‘아름다운 순례길’과 제주의 ‘올레길’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뚜벅뚜벅 길을 걸으며 보는 세상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보는 세상과 다르다. 출발하는 마음과 도착할 때의 느낌도 다르다. 길은 이어지고 길을 걷는 도중에는 마디처럼 문(門)이 있다. 길을 걸으며 보고 느꼈던 세상을 몇 차례 나누어 써 본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현실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낡고 익숙한 껍질을 벗어 던지는 일이다. 공직 생활이 30년에 달했을 무렵부터 신상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길을 나섰던 이유는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과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싯다르타의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할 일이지만 나름의 작은 포기와 재탄생을 기대하며 길을 걸었다.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아 온 자기 자신의 에고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아집과 편견의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걸었다. 멀고 힘든 여정일수록 더 많이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택한 길이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굳이 고통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더 깊게 그리고 더 치열하게 내려놓고 싶었다. ‘믿음’과 ‘성장’은 자신의 에고를 공고하게 하는 과정이 아니다. 자신의 고정 관념을 버리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최소한의 관용을 갖지 못하는 근본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믿음을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걷기’라고 했나 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도전을 걸어왔다. 인류가 쌓아 왔던 문명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인류는 이 거대한 도전을 이겨내야 한다. 인공지능(AI : Artificial Intelligence)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지능으로 무장한 신인류를 인정하고 그들의 삶의 규율에 맞춘 행동 양식을 가지는 사랑을 트랜스 휴머니즘이라고 명명한다는 글을 읽었을 때 인간의 정체성을 의심한 적이 있다. 미래의 그런 모습이 인간이라면 현재의 인간은 무엇인가? 과거, 현재, 미래의 인간 중에 무엇이 진정한 인간인가? 그러한 생각의 와중에 엉뚱하게도 이러한 미래를 향한 인간의 노력도 어느 하나의 큰 사건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세계적 전쟁이 인류를 원시 상태로 되돌려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와 보니 전염병이 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과 전염병은 모두가 인간의 이기심과 자신에 대한 욕망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전쟁과 전염병은 자기 자신에 교만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영복 선생은 그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교도소의 여름은 주위에 있는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기에 겨울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고 말하고 있다. 겨울은 아무리 추워도 옆 사람이 37도의 난로가 될 수 있지만, 여름은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는 가혹한 계절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겨울 감옥이라면 전염병은 여름 감옥과 같다. 전쟁 중에는 적군은 멀리하지만, 아군은 같이한다. 그러나 전염병의 시대에는 적군도 아군도 없다. 모든 인류가 한 편이지만 서로 몸으로 안아줄 수는 없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떠나기를 요구하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향해 무관심과 분열을 버리고 단합과 연대를 당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부활절 메시지는 그 길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새로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자신을 내려놓고 더 큰 세계를 가슴에 품는 넓은 가슴이 필요하다. 겸손과 관용이 그 최소한이고, 사랑이 그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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