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조합원에게 ‘임금 동결’과 '고용 보장'을 맞바꾼 독일의 사례를 참고하자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산업계 전반으로 고용 위기가 번지자 대비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질 수 있을지 관심이 주목된다.
19일 노동계에 따르면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는 소식지를 통해 “신용평가기관 ‘피치’가 수출시장 붕괴로 인한 현대차의 유동성 위기를 전망했다”며 “독일식 위기돌파 해법을 모델 삼아 노사정이 일자리 지키기에 합심해야 한다”고 밝혔다.
노조가 언급한 ‘독일식 해법’은 최근 독일 노사가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맺은 위기협약을 뜻한다. 노동계에 따르면 독일 금속노조와 사용자단체는 지난달 31일로 끝날 예정이던 임금협약을 올해 말까지로 연장했다. 사실상의 임금 동결이다.
대신 기업은 연간 특별상여금인 크리스마스 보너스와 휴가비를 12개월로 나눠 분할 지급하기로 했다. 독일 정부도 경기침체로 일감이 줄어 사업장 소속 노동자 3분의 1 이상에게 임금 손실이 생기면, 손실 임금의 60~67%를 보전해 주는 ‘조업단축급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이 밖에도 기업이 사업장 소속 노동자 1인당 350유로(약 46만 원)씩 기금을 적립해 생계에 타격을 입은 노동자에게 지원하고, 연말에 기금이 남으면 전체 직원에게 나눠주는 내용도 담았다.
노사정이 힘을 합쳐 코로나19로 인한 기업의 위기와 노조의 고용 불안을 동시에 해결키로 한 것이다.
현대차 노조는 “독일과 한국의 노사관계 제도가 다른 만큼 독일식 협약을 일률적으로 한국에 적용할 수는 없다”면서도 “독일 노사가 보여준 위기 극복 방향성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코로나19 위기 속 '일자리 지키기'라는 대명제 앞에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생존을 위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년 임금 인상을 위해 투쟁해온 현대차 노조가 임금 동결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언급한 건 이례적인 일이다. 현대차 노조의 임금이 동결된 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이 마지막이고, 노조가 먼저 임금 동결을 제안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번 제안은 노조가 실용주의 노선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고, 코로나19 사태의 위기에 공감했기에 가능한 결과로 풀이된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해 9월 일본의 수출규제와 차 산업 침체 등을 고려해 파업 없이 임금 및 단체교섭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8년 만의 무분규였다. 올해 초 임기를 시작한 실리 성향의 이상수 지부장은 간담회에서 “‘묻지 마’식 투쟁에 조합원들도 식상해 한다”며 “회사가 발전해야 고용도 안정된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노조는 회사와 특별합의를 맺고 협력업체와 지역사회를 지원했고, 품질력을 바탕으로 생산성을 만회해 고객에게 믿음을 주자며 조합원을 독려했다. 최근에는 회사의 상황이 좋지 않아 올해 임금협상을 당장 진행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밝혔다.
차 업계는 코로나19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노사정 협력이 이뤄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일단 당사자들 간의 대화가 진행될 여건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등 산업계는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노조에 협조를 구한 상태다.
또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지난달 처음으로 노조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정 부회장은 "생산현장에서도 위기극복을 위해 노사가 함께 노력해주는 데 깊이 감사한다"며 "이번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 서로 물리적 간격은 멀어지더라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심리적 간격은 오히려 가까워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총선에서 정치권력이 재편되며 노동계가 사회적 협의체에 참여할 가능성도 커졌다. 당장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18일 정세균 국무총리와 만나 노사정 대화에 관해 의논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산업의 위기를 노조도 인식하면서 회사와 협력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며 "대립을 넘어 협력적 노사관계가 정착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