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CNBC의 ‘파워 플레이어’ 코너에 소개된 피터의 성공기는 아버지 버핏의 일대기 못지않게 흥미롭다. 피터가 19세 때 버핏은 부친의 농장을 판 돈 9만 달러(약 1억 원)로 버크셔 주식을 사서 피터에게 물려줬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부자의 유산이라기엔 매우 인색하다 싶지만, 자녀 교육에 매우 엄격했던 버핏이니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9만 달러를 받은 피터는 그 길로 스탠퍼드대학을 자퇴하고, 수중의 돈을 다 털어 무작정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꿈꿔온 뮤지션의 길로 접어들었다. 없는 돈을 쥐어짜 값비싼 녹음 장비를 사고, 관련 업계에서 무급으로 일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인맥과 실력이 쌓이면서 어느덧 할리우드의 유명 음악 프로듀서로 우뚝 섰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늑대와 춤을’ OST에 삽입된 ‘불의 춤’이 그의 처녀작이며, 인디언 이야기를 다룬 ‘500 네이션스’로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머리가 희끗희끗한 60대이지만, 여전히 뮤지션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돈을 아직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가진 버크셔의 주식 가치는 2억 달러가 넘는다. 40여 년 동안 약 25만%가 뛴 것이다.
피터는 2010년에 펴낸 자서전 ‘Life Is What You Make It(인생은 당신이 만드는 것이다)’에서 그랬다. “돌이켜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회사에서 고소득을 올리며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그는 아버지에게서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진심으로 열정을 느끼는 분야를 찾아내고, 꿈을 향해 최대한 노력하고 살다 보니 어느덧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된 것이다. 그는 청년들에게도 고한다. “돈을 위해 일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지난 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문 중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은 부(富)와 경영권의 대물림이 당연시되어온 우리나라 재벌 관행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에서 재벌이라 하면 어릴 때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고, 가족 소유 기업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고속 승진해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앉는다. 해외에서는 이런 ‘재벌’을 ‘Chaebol’이라는 고유명사로 부르며 매우 특이한 시스템으로 본다.
하지만 이젠 재벌가 자녀들도 아버지의 꿈이 아닌, 자기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더는 부모로부터 거대 재산과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 꼼수를 쓰지 않아도 된다. 매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재벌 개혁’이란 구호 아래서 세간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된다.
국내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을 ‘삼성전자의 미래’라고 한다. 금융계와 산업계를 아우르며 스웨덴 국민총생산(GNP) 3분의 1을 간접 지배하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삼성이 나아가야 할 롤 모델이라는 이유에서다.
이 집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앙드레 오스카르 발렌베리 후손들이 모두 선대의 업(業)을 물려받은 건 아니었다. 어느 집안이나 별종은 있게 마련이다. 앙드레의 손주인 구스타프는 댄서이자 배우, 극장 매니저로 이름을 남겼다.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금융가나 기업가, 정치가로 남았지만 외교관 아버지와 테니스 선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뉴욕으로 날아가 자신의 꿈을 이뤘다.
발렌베리 집안처럼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고’ 싶다면 이젠 재벌들도 아이들에게 꿈꿀 기회를 줘야 한다. 아이돌 가수, 1인 크리에이터, 의사, 축구 선수, 소방관처럼 여느 아이들이 꾸는 평범한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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