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C현대산업개발이 한국산업은행에 아시아나항공 인수 조건의 재협상을 전격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해 말 인수 계약 직후 예상치 못한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아시아나의 재무 상태와 업황이 급격히 악화됐다는 이유에서다.
시장에서는 현대산업개발이 인수 조건 전면 재협상이라는 승부수를 띄우면서 더이상 주 채권단인 한국산업은행의 뜻대로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점 재협상을 통해 인수 가격을 크게 낮추기 위한 포석이란 것이다. 만약의 경우 거래가 불발될 경우를 대비해 퇴로를 열어둔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현대산업개발은 9일 산업은행에 아시아나 인수 상황 재점검 및 인수 조건 재협의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아시아나항공 인수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을 산업은행에 회신했다고 덧붙였다.
현대산업개발과 미래에셋대우 컨소시엄은 지난해 12월 27일 금호산업, 아시아나항공과 각각 주식매매계약 및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하고 인수 절차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전했다.
하지만 계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코로나19로 인수 가치를 현저히 훼손하는 여러 상황이 명백히 발생해 재협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현대산업개발-미래에셋 컨소시엄 측에 따르면 아시아나는 계약 체결 당시와 비교해 지난해 말 기준 2조8000억 원의 부채가 추가로 인식됐다. 1조7000억 원 추가 차입으로 부채는 4조5000억 원 늘었다. 이에 부채 비율은 계약 기준인 지난해 반기 말 대비 올해 1분기 말 현재 1만6126% 치솟았다.
이 기간 자본 총계는 1조772억 원 감소해 자본 잠식 규모가 크게 악화됐다. 지난해 순손실과 올 1분기 당기순손실은 8000억 원 이상 확대됐다.
컨소시엄 관계자는 “3월 공시된 2019년 감사보고서에서 아시아나의 외부감사인이 아시아나의 내부회계관리제도에 대해 부적정 의견을 표명함에 따라, 이번 계약상 기준인 재무제표의 신뢰성 또한 의심스러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 “4월 이후 두 달간 11회에 이르는 공문을 통해 현재 아시아나의 정확한 재무상태와 전망치를 요청했지만,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한 공식적 자료를 받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시아나는 오히려 컨소시엄의 명시적인 부동의에도 불구하고 추가 자금의 차입 및 부실 계열회사에 대한 자금 지원을 결정하고 관련된 정관 변경, 임시주주총회 개최 등 후속 절차를 강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자사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인수 조건을 원점에서 다시 협상하겠다는 것이다. 아시아나 몸값을 최대한 낮추는 방향으로 재조정해 자금 부담을 줄이고, 만약의 경우 딜이 불발되면 컨소시엄 측은 인수를 성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명분을 갖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컨소시엄은 아시아나 인수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계약 기준 재무제표가 재무 상황을 적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돼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또 코로나19를 극복하고 산업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지원책과 계약 체결 당시의 본원가치를 회복하는 것을 전제로, 계속기업으로 존속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채권단에 요청했다.
업계에서는 현대산업개발이 자칫 인수ㆍ합병(M&A) 시장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승자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이처럼 강력한 카드를 꺼내 든 것으로 보고 있다. 코로나19로 항공업황이 언제 회복될 지 시계제로인 상황에서 계약금 2500억 원을 포기하는 것이 차악이라는 분석도 많다. 향후 컨소시엄 측은 인수를 성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불가항력의 사정으로 딜이 불발된 만큼, 계약금을 모두 내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입장을 내놓을 수도 있다.
현대산업개발 관계자는 “아시아나를 성공적으로 인수해 발전시킴으로써 향후 우리나라 항공산업의 정상화와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면서도 “인수 계약 관련 중대한 상황들에 대한 합리적 재점검과, 인수 조건에 대한 원점에서의 재협의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