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네가 처음이야”

입력 2020-06-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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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연 금융부 기자

“네가 처음이야.” 뜨거운 눈빛 속 오가는 떨리는 대화. 수줍은 연인의 고백에 처음이란 말은 필수 수식어다. 아마 ‘첫’이란 단어에 내포된 설렘 때문일 것이다. 첫사랑, 첫 키스, 첫 직장, 첫 월급 등의 단어만 봐도 그렇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체험은 한 인간에게 작게는 놀라움을, 크게는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어젯밤에도 보고 오늘밤에도 만나게 될 초록색 유리병 이름이 ‘처음처럼’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처음에 먹은 마음, 그 초심이 갖고 있는 순수함과 열정의 가치를 모두가 알기에 처음 그때로 돌아가려고 한다. 과거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하고 접했던 그때의 초심을 되찾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초록색 병을 기울인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실생활에서 처음이란 단어는 불순한 의도인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비정상적 행위들은 처음이라는 단어 뒤에 숨는다. 우리를 공분케 하는 수많은 (데이트, 가정, 학교 등 모든 범주의) 폭력 혹은 음주운전 재판에서 처음이라는 이유로 형이 내려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처음이란 조건은 주취 상태만큼이나 형을 깎는 단골 치트키로 활용된다. 악용 사례는 굳이 말하면 입 아프다.

최근 모 은행의 성희롱 사건을 취재했다. 현재 사측은 피해자의 신고를 받고 가해자를 조사 중이다. 역시나 가해자 입에서는 “처음이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변호사들은 가해자가 인사위원회에서 면직 처분을 받더라도 의미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가해자가 복직소송으로 가면 무조건 승소하게 돼 있다는 뜻이다. 해당 인사위원회 위원 전부가 남자라는 것은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풀어보고자 한다.

최초 혹은 처음. 기자들이 참 좋아하는 단어다. 두 단어가 들어가면 필시 단독 보도로 이어지기 마련. 나 또한 단독 욕심 많은 흔한 기자이지만 더 이상 성희롱, 성추행 관련 단독은 사양한다. 가해자가 다음 해에 버젓이 본래 자리로 돌아오는, 피해자만 안절부절 못 하고 가시방석에 앉는 뻔한 결말에 우린 이미 질려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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