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입력 2020-06-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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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하태환 옮김, 민음사, 2012)

모닝커피에 달걀노른자를 넣어주던 그 많던 서울 시내의 다방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마흔 해 전쯤 서울 광화문 부근에 있던 귀거래, 자이안트, 아리스, 연 같은 상호를 단 다방들이 기억에 떠오릅니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고향역’도, 기름진 금전옥답으로 풍성하던 ‘고향’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많은 장소들이 물거품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많은 직업들도 사라졌지요. 그 많던 가마꾼, 유모, 전화교환수, 속기사, 필경사, 버스안내양, 넝마주이, 사형집행인, 묘지기, 종지기, 굴뚝청소부, 머리카락수집상… 등등의 직업군이 사라졌지요. 요즘은 기억조차 못 하는 얼음절단사, 개미번데기수집상, 커피냄새탐지원, 촛불관리인, 말장수, 모래장수… 등등도 오래전엔 인기가 있는 직업군이라고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날은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날들이고,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것들이지요.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넘어져서 깨진 무릎, 예닐곱 살 때 빠진 유치(幼齒)들, 여름 정원의 한때, 가을밤 창공의 오리온 별자리, 스무 살 때 개복수술 뒤 전신마취에서 깬 새벽의 통증, 서른 살 무렵 낮잠에서 깬 오후에 내리던 비, 굴뚝새의 노래, 논산 외가의 부엌에서 마주친 쥐의 머루처럼 까만 눈동자, 집에서 기르던 개의 고요한 죽음, 어느 여름 택시에 두고 내린 우산, 그토록 많은 계절들과 노래들…. 우리는 사라진 시간과 상실들 위에 삶을 세웁니다. 그러니 시간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사라짐, 혹은 상실 없이는 어떤 삶도 있을 수 없지요.

‘왜 모든 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가?’가 오늘의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실재는 개념에 삼켜지고, 꿈과 욕망은 실현 속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는 사라짐을 최종 차원으로서가 아니라, 널리 편재한 차원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존재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말할 참이다. 자신의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 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사라짐에 대하여’) 세월의 느린 리듬 속에서 사라짐은 만물의 운명이자 모든 존재가 짊어지는 숙명입니다. 사라짐이 존재의 필수 조건이라고 할 때 우리는 사라짐이라는 기초 위에 삶을 세워 살고 있는 셈이지요.

이문세가 부른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텅 빈 하늘 밑 불빛들 켜져 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가며 불러보네”라는 ‘옛사랑’(이영훈 가사, 1991)이란 낭만적 노래가 있지요. 옛사랑의 이름을 아껴 가며 불러본다는 노랫말에 가슴이 베인 듯 아픔으로 쩔쩔매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요. 옛사랑은 환영(幻影), 헛것,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재가 없는 사랑이 추억과 회한 속에서 사무치는 것은 그것이 지나간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돌이킬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언제나 상실이라는 토대이지요. ‘옛사랑’에서 느끼는 애절함은 상실이라는 고통을 먹으며 자라난 슬픔의 다른 이름이지요.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그건 아직 사라진 건 아닙니다. 진짜로 사라지는 건 망각이 집어삼킨 것들이지요.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지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김창완 노래, ‘청춘’, 1981)

어제에 대한 동경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솟구칩니다. 흔히 ‘옛날이 더 좋았어!’라고 말합니다. 물론 예전이라고 마냥 유쾌하고 좋았던 기억만 있는 건 아니지만 옛날은 꿈속의 세월이고, 아련한 그리움 속에서 미화된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시간이지요. ‘옛날이 좋았어!’라는 말은 현재에 대한 불만이 과거를 은신처로 삼는다는 인과관계 속에서 부분적 진실을 머금고 있는 셈이지요. 가고 없는 날을 기리는 노래는 우리 가슴에 아련한 슬픔을 남기지요. 청춘은 가고 없는 날이지요. 우리가 보내지 않아도 어디론가 사라진 날을 붙잡으려는 손짓은 공허하지요.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존재건 다른 무엇이건 소실점 저 너머로 사라져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 그래서 시야에서 멀어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인가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사라짐의 운명 속에 있지요. 지금 살아 있는 우리는 어느 순간 죽음을 맞고, 무로, 태허(太虛)로 돌아가겠지요. 무로 돌아간 주체는 제가 살았던 세계를 돌아볼 수도 없겠지요. 결국 무엇인가가 사라진 뒤 실재가 있던 자리는 공허와 무로 채워지겠지요.

그러나 기술복제시대 이후 사진과 영상으로 만들어진 재생-이미지가 넘치는 세상에서 무엇인가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바대로 21세기가 “미디어와 가상 현실, 네트워크의 시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디지털적인 이미지는 엄청난 자기 증식을 통해 그 공허를 채워 나간다”는 말도 사실이겠지요. 주체는 사라져도 그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들은 도처에 남아 떠돌아다니지요. 사라진 것들이 사라지지 않은 채 현실이건 가상공간이건 어딘가에 남아 영원히 떠돈다는 것, “끊임없는 이미지 재생의 그물망 속에 잡혀” 부유한다는 것은 끔찍할 수도 있겠지요.

그 무엇이든 한 번 존재한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무튼 아무것도 간단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소실점 저 너머로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그 뒤에 마치 그림자를 드리우듯 잔영을 남기지요. 환상, 유토피아, 욕망의 애틋함이 실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잔영이지요. 지구 위에 출현한 생물 종은 이미 멸종 선고를 받았을지라도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사라졌지만 사라지기를 멈추고 그것이 항구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게 뭘까요? 클론, 정보화, 네트워크가 진짜로 사라지는 것을 막는 기술적 기반입니다. 진짜 살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은 가상으로 남아 있지요.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의 공간에서 원본 없는 이미지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춤춥니다. 실재가 사라져도 이미지가 현실을 물고, 현실이 이미지를 물면서 영겁 운동을 합니다. 실재가 없는 이미지는 “자기 고유의 덫”에 잡혀 “이미지의 이미지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이미지-재생 속”에 갇힌 채 자기 복제를 되풀이하겠지요. 지금 우리 시대는 무엇이든지 이미지 복제라는 영원한 운동 속에서 갇힌 탓에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져 버립니다.

젊었을 때는 미래를 더 자주 생각하며 살았는데, 현재의 고통이 끔찍했던 탓이지요. 나이가 들어 과거를 반추하는 일이 더 잦아집니다. 지금보다 훨씬 파릇하던 과거가 젊음의 영화(榮華)를 누렸던 시절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젠 “푸르른 청춘”의 때는 덧없이 사라지고, 그 노래를 부르던 이도 없습니다. 버드나무 잎처럼 푸르던 청춘과 함께 시간도, 장소도, 사람도 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사라진 존재는 돌아오지 않아요.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듯이 한 번 간 것은 영원한 회귀 불능 상태에 놓이지요. 이 세계는 사라지는 것들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끊임없이 사라짐을 연기(演技)합니다. 산다는 건 사라짐의 연기를 이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세상이 더 이상 우리 연기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진짜로 세상에서 사라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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