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와 연기가 아닌 직접 쓴 이야기를 평가받으려고 하니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어릴 때부터 가져온 꿈을 이룬 순간이지만 후련하거나 뿌듯함보다 긴장감이 더 크다. 완성된 게 대견할 따름이다. 아쉬운 점은 돌아서면 생각난다.
배우 정진영이 데뷔 30여 년 만에 영화 '사라진 시간' 감독으로 관객과 만난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인근에서 만난 정진영은 "내가 모르던 내가 거기에 담겨 있는데, 누가 포착해서 추궁하면 어쩌나 싶다"며 미소지었다.
지난달 18일 개봉한 '사라진 시간'은 의문의 화재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형구'(조진웅)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가제는 '클로즈 투 유(Close to you)'. 2017년 가을에 쓴 가을 배경의 영화를 2018년 가을에 필름으로 담았다. 낮보다 밤이 긴 이 영화를 관객에게 내놓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개봉일이 밀리기도 했다.
정진영은 장면마다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주저했다. 모든 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그는 갑자기 등장인물이 나오고 이내 사라지는 것에 대해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고 갑자기 이야기를 맺고 싶었다"며 "제한된 공간에서 계속 이야기를 짊어지고 가길 바랐다"고 했다.
다음은 정진영과 일문일답.
- 영화 속에 '인간 정진영' 이 어느 정도 담겼나.
"내가 없다고 생각했다. 첫 영화인데, 내가 거기에 담기면 자기 연민에 빠질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모습이 담기게 된 것 같다. 혹자는 '형구가 당신 아니야?'라고도 한다. 형구가 나라고 생각하고 쓰지 않았다. 다만 형구가 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은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하는 고민이지 않나."
- 영화가 '나는 누구다'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지점이 있었나.
"'나는 누구인가'는 선문답일 수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고민이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란 생각이 커지는 거 같다. 그런 갈등이 우리 모두에게 존재한다. 나이 든 사람일수록 이런 지점이 많은 거 같다. 삶의 경험 속에서 진짜 나와 느끼는 나와의 충돌을 끊임없이 겪는다."
- 감독 자신도 영화에 대해 '모호하다'고 했다. 어떤 해석이 적절할까.
"해석은 틀린 게 없다. 틀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나의 충돌, 거기에서 약해지고 외로운 인간, 그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공감했을 때 생기는 것들을 던졌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렵게 보면 어렵고 쉽게 보면 쉬운 영화다. 배우 정해균이 '모르겠다'고 말한 것은 논리로 알 수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안다'라는 게 오히려 착각일 수도 있다."
- 제목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는가.
"카펜터스(Carpenters)의 '클로즈 투 유'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계속 들은 음악이다. 이 제목은 노래와 함께해야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음악이 비싸서 포기했다.(웃음) 떠올린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다가온 음악이었다. 음원을 내려받고 온종일 들으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우연히 다가오는 것들이 깊게 자리 잡기도 한다. 이 영화를 쓰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시놉시스를 한달음에 썼다. 간결하고 선명하게 '사라진 시간'으로 제목을 붙이니 그 안에 이야기가 들어갔다."
- 왜 조진웅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나.
"내용은 그냥 쓸 수 있지만, 등장인물의 말투, 동작, 버릇은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으면 쓰기 힘들다. 구체적으로 그 사람이 머릿속에 돌아다녀야 한다. 조진웅을 떠올리며 썼다. 이전엔 그런 말들이 거짓말인 줄 알다. 그런데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쓴다는 말들은 진짜였다. 사실 조진웅이 할 가능성이 아주 적다고 봤다. 조진웅은 굉장히 바쁘고 대한민국 톱배우이지 않나. 이 영화는 예산이 매우 작은 영화다. 보낼까 말까 망설이다가 보내놓고 거절당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초고가 나오자마자 보냈다. 그다음 날 바로 하겠다고 해서 놀랍고 고마웠다."
- 조진웅이 영화 마지막에 '참 좋다'라고 하며 주어진 삶에 순응하고 살아간다. 실존주의와 맞닿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실존주의를 말하는 마지막 세대다. 어릴 때의 생각은 평생 가는 것 같다. 실존주의라고 하면 어려워 보이지만, 자신의 실체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참 좋다'라는 대사엔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카뮈가 쓴 '시지프스 신화'라는 책이 실존주의 철학 핵심 명제다.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하려다가 말았다.(웃음) 내가 한 생각이 무엇인지 따지지 않고 늘어놨다. 실존주의를 염두에 두고 했던 판단이다."
- 영화가 친절하지 않기도 하다.
"설명이 많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우리나라 영화들은 설명을 친절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객들이 따라오지 않아서다. 여기저기 설명을 숨겨놨다. 관객들이 이야기의 파도를 타고 서핑을 하듯 툭툭 따라오길 바란다.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들어가는 형식으로 진행하고 싶었다. 재담 넘치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옛날에 말이야~'라고 말하듯 전개하고 싶었다."
- 배우로서 배우의 입장을 더 잘 이해했을 거 같다.
"배우가 관객에게 담백하게 보이길 바라는 마음에 기법을 화려하게 쓰지 않았다. 자극적인 것을 넣고 싶지도 않았다. 배우를 믿는다. 배우는 감정을 가져온 사람들이다. 내가 주황색을 원하면, 그들은 주홍색이나 연분홍 정도의 톤을 가져온다. 그게 어느 순간 맞아 떨어지더라."
- 새 시나리오 계획도 있나.
"모르겠다. 또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첫 영화는 하고 싶단 이유로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그 이유만으로 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모르겠다. 또 생각해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