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94년 김철수 상공부 장관과 2012년 박태호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 WTO 사무총장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그동안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 김용 세계은행(WB) 총재, 임기택 국제해사기구(IMO) 사무총장,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등 주요 국제기구에 한국인 출신 수장이 나왔으나, WTO 사무총장은 없었다. 유 본부장이 사무총장에 선출되면 한국인 최초이자, WTO 첫 여성 사무총장이라는 기록도 세운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 유 본부장이 WTO 사무총장이 돼 국민에게 낭보를 전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장폐천(以掌蔽天)이란 말이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뜻으로, 얕은 수로 잘못을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달 24일 유 본부장이 정부세종청사에서 입후보 브리핑을 하기 하루 전날인 23일 ‘유 본부장이 입후보 한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에 산업부에서 ‘확정된 바 없다’는 보도 설명 자료를 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통상라인 고위 공무원은 ‘아직 확정된 게 없어서 확정된 게 없다고 하는 거다’란 입장을 보이며 보도 설명 자료 배포 의사를 밝혔다. 산업부는 그날(23일) 오후 ‘24일 WTO 사무총장 입후보 관련 브리핑’ 공지를 계획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고위 공무원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역시 브리핑 공지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뒤면 유 본부장의 WTO 입후보 공식화 브리핑 공지가 나가는데, 그 몇 시간을 모면하기 위해 그런 정책적 결정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확정된 바 없다’는 보도 설명자료를 배포하려 했던 판단을 해당 고위 공무원이 했는지, 통상교섭본부장이 했는지, 산업부 장관이 했는지, 청와대에서 했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보도 설명 자료는 배포되지 않고 몇 시간 뒤 ‘24일 11시 WTO 사무총장 입후보 관련 브리핑’이 공지됐다.
목민관(공무원)의 경국제민(經國濟民) 지침서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엔 ‘대중을 통솔하는 길은 위엄과 신용뿐이다. 위엄은 청렴에서, 신용은 충에서 나온다. 충하면 능히 청렴할 수 있으니, 이로써 대중을 따르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신용은 믿음이다. 몇 시간 뒤면 ‘브리핑’을 한다고 공지를 해야 하는데, 처음엔 ‘확정된 바 없다’고 한 뒤 손바닥 뒤집듯 했다면 국민이 정부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유학(儒學)에서의 충(忠)은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마음이다. 우리 시대의 목민관들은 어떨까.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을까. 그들이 치우쳐야 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국민뿐이다. ri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