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가면 항상 들르는 곳이 있다. 예전에는 성산 일출봉이었는데 지금은 사려니숲길이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다. 머리가 번잡하고 심신이 피곤할 때 이곳은 나에게 힐링을 준다. 입구는 관광객들로 복잡하지만 30분 정도만 걸으면 한적해진다. 머리 위에서 나는 까마귀 떼와 가끔 출몰하는 고라니가 숲길의 정적을 깰 뿐이다.
역사는 결국 공간이다. 그래서 장소의 체험은 곧 역사와 마주치게 된다. 최근에야 알았다. 이곳이 제주 4·3의 마지막 무장부대였던 이덕구와 부대원들이 최후를 맞은 곳이라는 걸. 사려니숲길뿐 아니라 제주의 유적지 대부분은 4·3과 관련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비경의 제주는 그 속살에 아픈 상처를 지금까지 숨기며 살아왔다.
영화 ‘지슬’은 오멸 감독이 4·3을 배경으로 만든 흑백영화다. 집을 담보로 제작비를 마련했다 한다. 선댄스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도 했고, 독립영화치곤 많은 20만 가까운 관객이 찾아와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국내 영화 중 유일하게 한글 자막이 들어간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 제주 방언 때문에 자막이 없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목 ‘지슬’도 감자의 제주 방언이다.
영화 ‘지슬’은 민족의 비극을 소재로 하지만 결코 비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집에 남아 있는 노모를 걱정하며 그저 집에 빨리 돌아가길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가 오름의 완만한 경사를 타듯이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관객은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역사를 마음으로 겪으며 황당해하다가 이내 분노하기도 하고 결국 좌절한다.
혹여 제주를 이번 여름에 가게 될 때 제주의 아픈 역사와도 한번 맞닥뜨려 보시길 바란다. 아는 만큼 새롭게 보이지 않겠는가? 참, 영화 ‘지슬’도 미리 한번 보고 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