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보호에서 벗어난 독립국 美의 고민
미국은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독립에 성공했지만, 대신 영국법의 보호를 받던 식민지 시절과 달리 영국의 보호 없이 독자적으로 상업 활동을 해야 했다. 특히 독립전쟁 이전에는 미국도 영국령이었기에 본국인 영국까지 배를 보낼 수 있었지만, 독립 후에는 영국 항해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참고로 영국은 1651년 올리버 크롬웰이 통치하던 시절부터 이른바 ‘항해조례’를 적용하고 있었다. 항해조례의 핵심 내용은 “오직 잉글랜드 혹은 식민지의 배만 영국 식민지로 상품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가장 강력한 라이벌 국가였던 네덜란드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독립 후의 미국에는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캐나다와 바베이도스를 비롯한 카리브해의 주요 섬이 모두 영국의 식민지인 상황에서, 미국 국적의 배는 가까운 나라 어디에도 짐을 실어나를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서부개발이라는 대안이 있긴 했지만, 당시는 증기기관이 발명되기 전이라 서부 개척의 진척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미국이 이 문제를 이겨내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나폴레옹 전쟁’이었다. 1789년부터 1815년까지 지속된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영국은 무려 일곱 차례에 걸친 ‘대(對)프랑스 동맹’을 주도하면서 치열하게 맞섰다. 프랑스도 영국의 공세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영국 본토 상륙 계획은 1805년 트라팔가 해전의 패전으로 무산되었지만, 대신 1806년 이른바 대륙봉쇄령(大陸封鎖令, Continental System)을 단행하여 영국과의 교역을 전면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佛, 대륙 봉쇄 vs 英, 경제 봉쇄
이에 영국도 프랑스에서 다른 대륙으로 가는 배들을 나포하는 경제봉쇄에 나섰다. 활발하게 진행되던 국가 간 무역이 자취를 감추고 각국 경제는 폐쇄경제로 돌아서는 것 같았지만, 경제봉쇄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영국에 포도주를 수출하던 포르투갈이 가장 먼저 대륙봉쇄령에 저항한 데 이어 네덜란드와 프로이센 그리고 러시아가 공공연하게 대륙봉쇄령을 어김으로써 세계 무역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때 가장 이득을 본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독립전쟁 때 자신을 지원해준 프랑스와 원래 돈독한 관계였다. 대서양에 면한 프랑스 남부의 보르도에 도착한 미국 선박의 숫자가 1795년 한 해에만 351척에 달할 정도였다. 물론 프랑스의 대륙봉쇄령, 그리고 이에 맞선 영국의 해상봉쇄 영향으로 이 숫자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도에 도착한 미국 선박의 수는 1795~1815년 동안 총 2410척,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115척에 이르렀고 이는 큰 수익으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미국 선박 덕분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충당하고, 또 유럽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해외 상품’에 대한 갈증을 다소나마 풀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국의 행동은 영국의 분노를 샀다. 영국 해군은 미국 동부 해안을 순찰하면서 선박을 나포하고 배를 수색한 것은 물론 ‘탈영병’이라는 누명을 씌워 선원을 잡아 가두는 등의 행패를 벌였다. 당시 영국 해군이 미국 선원들을 잡아간 것은 병력 부족 때문이었다. 영국 본토의 도시에서 밤중에 호각을 신호로 길거리에 나와 있는 모든 남성을 무차별로 징집하는 일을 벌일 정도로 병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미국 선원들은 항해 기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영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가장 적합한 징집 대상이었던 셈이다.
가족을 영국군에게 징집당한 사람들의 분노가 들끓었지만, 전쟁에 자신이 없었던 제퍼슨 대통령은 선전포고 대신 ‘수출입 금지 조례(1807년 12월)’를 선택했다. 영국에 괴롭힘을 당할 것이니 아예 바다로 배를 띄우지 말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 결과 1807년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의 수출은 4900만 달러에 이르렀지만 1808년엔 900만 달러로 무려 80% 이상 감소했다.(아래 미국의 수출입 추이 그래프의 숫자는 영국 해군의 순찰을 피하기 위해 유입되었던 재수출 물량을 합친 것이라 미국산 제품의 수출과 금액에 큰 차이가 있다.)
美, 처음엔 英에 수출입 금지로 맞서
1807년 제퍼슨 대통령이 폐쇄정책을 시행했던 이유는 “영국도 ‘무역봉쇄’로 피해를 볼 것이니 조금만 참으면 미국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었지만 영국의 태도는 완강했다. 결국 14개월이 지난 1809년 3월 제퍼슨 대통령은 수출입 금지 조례를 폐기함으로써 사실상 영국에게 굴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14개월 동안의 폐쇄정책은 미국의 위신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큰 타격을 가했다. 당시 미국의 주요 수출 품목이었던 담배, 밀가루, 면화, 쌀 등의 1차 상품 가격이 수출 금지 조치로 인해 연쇄적으로 폭락했다. 쌀은 50%, 면화와 밀가루는 30~40% 폭락했으니 당시 농촌 경제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더글라스 어윈을 비롯한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당시 수출입 금지로 인해 발생한 경제적 손실을 국내총생산(GDP)의 약 5%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참고로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국 경제가 2.5% 역성장했던 것을 감안하면, 1807년의 무역봉쇄 조치가 얼마나 심각한 충격을 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커져가는 경제적 피해, 결국 전쟁 선택
미국이 1812년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경제적 피해, 그리고 영국의 강압적인 행동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다는 점도 전쟁을 일으킨 이유로 작용했다. 그러나 1812년 말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여력이 생긴 영국이 군대를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시키면서, 미국은 수도 워싱턴이 점령당하고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이 불타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물론 미국도 마냥 당하지 않았다. 1815년 1월 미국 남부에서 벌어진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에서 앤드루 잭슨이 이끄는 미 육군이 영국군의 상륙을 저지하며 큰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총 안에 강선이 파인 라이플(rifle) 소총으로 무장함으로써 영국군에 비해 압도적인 사거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승리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미군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국 장교를 집중적으로 저격해 지휘망을 흐트러뜨림으로써 손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두 나라 모두 전쟁을 지속하려는 의지가 부족했다. 무엇보다 영국은 오랜 기간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손실을 입었고, 미국은 영국이 프랑스를 굴복시킨 이후 해상봉쇄를 풀면서 무역의 어려움이 해소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815년 초 헨트 조약을 통해 전쟁이 종결되고, 다시 예전처럼 우호적인 관계를 갖기로 합의했다.
‘전열보병’ 겨냥한 무기 혁신도 한몫
미영전쟁은 크게 보아 두 가지 교훈을 남겼는데, 첫 번째는 아무리 잘 훈련된 정예병이라 하더라도 무기 혁신 앞에서는 무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군의 주력 무기인 활강식 머스킷은 사거리가 짧고 또 부정확했기에 나란히 늘어서서 총을 쏘는 이른바 ‘전열보병(line infantry)’ 전술에 의지했는데, 이는 미국의 저격병에게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참고로 미영전쟁으로 교훈을 얻은 영국군은 이후 벌어진 크림전쟁에서 전열보병 전술을 펼치는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두게 된다.
미영전쟁의 두 번째 교훈은 “경제봉쇄보다 차라리 전쟁이 더 낫다”는 것이었다. 무역을 못하는 고립경제의 환경이 지속되면 앉아서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전쟁은 상대의 방심을 노려볼 수 있고 또 새로운 혁신을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더 나은 선택이 되었던 셈이다. 물론 전쟁이 무조건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 ‘폐쇄경제’가 경제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입증한 역사적 경험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