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가 9일 유럽연합(EU)과 올 초 체결한 탈퇴조약을 위반하는 법안을 제시하자 EU의 한 고위관리가 이처럼 발언했다. 한동안 뜸했던, 영국이 합의 없이 EU를 탈퇴하는 ‘노딜 브렉시트’ 우려가 다시 커졌다. 다음 달 15일 브뤼셀에서 열리는 EU 회원국 수반들의 정상회담(유럽이사회) 전까지 획기적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는 한 노딜 가능성은 커진다. 지난주 런던에서 열렸던 영국과 EU 간의 8차 신관계 협상이 아무런 진전 없이 종결됐다.
논란의 핵심은 영국령인 북아일랜드 관련 이슈다. 지난 1월 비준된 탈퇴조약에 따르면 북아일랜드는 EU의 관세체제를 따른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간의 국경통제 재도입을 저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영국산 제품이 북아일랜드에서 판매될 경우 EU의 국가보조금 규정 적용을 받게 된다. 영국 정부는 이를 폐기하려 한다.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수십 년간 노동당 정권을 지지해온 잉글랜드 중북부 유권자들이 보수당을 지지했고, 이 때문에 보리스 존슨은 안정적 과반을 얻어 집권했다. 그는 지역 간 격차 해소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런던에서 버밍엄, 맨체스터 등 주요 도시에 이르는 1000억 파운드(약 160조 원)가 더 드는 대규모 고속철도 공사를 시작했다. 영국은 또 각종 첨단산업을 집중 육성하려 한다. 코로나19가 야기한 불황 극복에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EU는 영국의 이런 신규 투자를 심사해 불허할 수 있다. 잉글랜드 등에서 제조된 제품이 북아일랜드에서 언제든지 거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경제에 국한된 게 아니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은 “영국이 탈퇴조약을 위반할 경우 미국과 체결할 자유무역협정(FTA)은 비준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한 하원에서 FTA를 거부할 경우 이 협정은 발효되지 못한다. 30년간의 유혈분쟁을 종결한 북아일랜드평화협정은 미국 민주당이 가장 크게 기여했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조지 미첼 상원의원을 북아일랜드 특사로 임명했고, 그는 분쟁 당사자들을 중재해 1998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미국은 EU와 함께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보장해왔다. EU는 이 법안이 북아일랜드 평화를 교란할 것이라며 이달 말까지 철회되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엄중 경고했다.
영국은 노딜도 불사하겠다며 협상용으로 이 카드를 제시했지만 그나마 협상력이 크게 떨어진다. 노딜이 강력한 협상 카드가 되려면 영국에 만반의 준비가 갖춰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노딜이 발생하면 당장 EU와의 교역에서 통관 절차가 도입되기 때문에 관세 지도사 수만 명이 필요하다. 정부 추산으로도 5만여 명. 그러나 아직 관세 지도사 양성은 제자리걸음이다. 현재 EU 회원국으로부터 영국에 들어오는 제품의 3분의 1은 도버항을 경유한다. 영국은 지난 1월 31일 EU를 탈퇴했지만 올해 12월 31일까지가 이행기(과도기)다. 아무런 통관 없이 영국으로 물품이 들어오는 것은 이날이 마지막이다. 통관에 필요한 수십 종의 서류를 작성해야 하고 무사 통관하던 화물 트럭의 통관 서류 제출에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통관 처리에 필요한 정보통신 시스템도 준비가 안 됐다. EU에서 농산물과 공산품의 절반이 수입된다. 기껏해야 재고가 2주 정도이기 때문에 슈퍼마켓에서 농산품 구입이 어려워지고 학교 급식이 중단될 수 있다. 노딜을 가정한 영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존슨 정부가 노딜 카드를 다시 꺼내든 것을 일부에서는 코로나19 실책 덮기로 본다. 영국은 이 전염병 대처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팬데믹을 이유로 노딜 브렉시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숨기려 한다는 것. 싱크탱크 유럽개혁센터의 샘 로우(Sam Lowe) 연구원은 “일부 강경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코로나19의 경제적 여파가 노딜보다 훨씬 클 것으로 여기고 이런 카드를 꺼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라고 전망한다. 영국 무역의 절반을 차지하는 EU 시장을 대체할 다른 시장 개척은 아무리 일러야 수년 걸릴 것이다. 이동 금지가 풀리고 경제활동을 재개하면 경기가 회복되겠지만 노딜에 따른 경기침체는 이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유거브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브렉시트를 지지한 국민투표 결정이 잘못됐다는 대답이 그렇지 않다는 답보다 최소 8% 정도 높다. 그렇지만 국민투표에서 나온 민의를 지켜야 한다고 유권자들은 생각한다. 문제는 경제에 큰 손실이 가는 탈퇴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에 포퓰리스트 존슨 총리는 하루빨리 EU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권을 행사하려 한다. 이제 노딜 브렉시트 여부는 한두 달 안에 판가름이 난다.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