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리포트]④힘 커진 개미들의 자화상 “고장난 주주 자본주의인가, 되찾은 주주 목소리인가”

입력 2020-09-2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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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주주행동주의 사례
자료 카카오페이증권
▲과거주주행동주의 사례 자료 카카오페이증권
LG화학의 배터리 사업 분사 사실이 알려지자 성난 ‘개미(개인투자자)’들이 속출했다. 성난 개미들의 ‘패닉 셀링(집단 매도)’ 움직임이 이어졌다. 분사 소식이 알려진 이후 이틀 동안 LG화학의 시가총액은 6조3400억 원이 증발했다.

회사는 부랴부랴 개미 달래기에 나섰다. 지난 17일, 차동성 LG화학 최고재무책임자(CFO·부사장)는 “물적분할 방식이 주주들의 이익을 결코 훼손하지 않겠다”며 “신설 배터리 법인 상장 시 자사가 절대적인 지분율을 보유해 오히려 주주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LG화학 물적분할로 인한 개인투자자들의 피해를 막아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원이 등장했다.

이처럼 오늘날 동학개미들은 기업 지배구조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존재감을 입증하고 있다. 개미의 위상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개미’에서 ‘불개미’로...목소리 내는 ‘개미 주주’

주주가 재벌 기업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동학개미들은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미국식 자본주의를 배우고 자란 세대다. 한국의 몇몇 재벌기업 오너들이 인수·합병(M&A)이나 분할·합병 등에서 잘못된 의사 결정으로 주주들에게 큰 손해를 끼쳤다는 점도 학습했다.

주주 가치 제고라는 명분으로 주식을 매입한 행동주의 펀드가 대기업을 무릎 꿇리는 사례도 봐왔다. ‘동학개미’라는 포장은 이를 바꾸고 힘을 과시하는 데 제격인 셈이다. 이에 최근 동학개미들의 근본적인 분노는 그동안 위축됐던 발언권에서 출발했다는 지적도 많다.

일각에선 주주 자본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주가 부양 여부’는 대표적인 경영 의사결정 기준이다. 문제는 경영 방식이 주가 등락에 휘둘리게 되면 주주 이익과 장기간 시장 전략 사이에서 충돌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LG화학의 분사설을 두고 개미들과 회사의 엇갈린 시각이 이를 보여준다. 개미들이 분노한 배경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미래를 보고 LG화학에 투자했는데 전기차 배터리 부문을 따로 떼어내 회사를 만들면 기존 LG화학 주주들은 LG화학의 배터리 부문 성장에 따른 이익을 가져갈 수 없다는 게 주요 골자다.

반면, 기업에선 다른 입장을 내놓았다. LG화학은 물적분할이 배터리 부문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선택이며 장기적으로는 기업과 주주가치 제고에 긍정적일 것이라는 입장이다. 황유식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재무적 투자자(FI)를 유치하거나 기업공개(IPO)를 통한 대규모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물적 분할이 효과적인데, 배터리 사업을 100% 자회사로 분사함으로써 환경에 따라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도록 운신의 폭을 넓힌 것”이라고 긍정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기적 ‘주주 자본주의’ 버리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가야

시장 전문가들은 “개인투자자들은 주주 가치를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만 쫓다 보면 ‘단기주의’에 매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20년 넘게 연속 흑자를 낸 보잉인 경우, 무리한 자사주 매입 및 배당금 지급으로 주주들에게 선심 쓰느라 여유자금을 쌓아놓지 못했다”며 “이는 코로나19 국면에서 시장 충격을 받게 된 배경”이라고 짚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과거 우리나라는 외국계 펀드를 통한 주주권 강화로 편익을 본 경험도 있는 만큼 ‘주주 자본주의’의 순기능도 분명히 있다. SK그룹은 헤지펀드 소버린의 공격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수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를 기점으로 지배구조는 보다 투명해졌고 주가도 장기적으로 크게 올랐다. 주주들이 적극적인 투자를 독려하는 등 기업 성장 의제에 목소리를 모은다면, 이는 기업도 체질을 강화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다만, 전문가들은 단기 투자로 ‘주식 알박기’를 한 다음 주주 가치를 내세우며 배당과 주가부터 챙겨달라고 위협하는 힘은 경계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엘리엇과 같은 벌처펀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기업의 중장기 발전을 위한 투자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로지 단기수익만 챙긴다는 점 때문이다.

한편,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자 최근 글로벌 시장에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분위기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주주만이 아니라 고객, 종업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정부 등 이해관계자의 공익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최고경영자(CEO) 이자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들을 대변하는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 회장은 “단기적인 주주가치 중시에서 벗어나 이해관계자들을 배려하는 경영철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기업·지역·국가 모두 장기적으로 번영하고 성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최태원 SK회장은 올해 초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공식 세션에 참석해 “기업 경영의 목표와 시스템을 주주에서 이해관계자로 바꾸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됐다”고 강조했다.

◆용어:이해관계 자본주의

자본주의가 전통적으로 주주 이익이나 기업 이익을 기반으로 했지만 지금과 같은 초연결 시대엔 이해관계자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아우르는 자본주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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