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 나온 ‘어른’의 정의다. 요즘처럼 ‘어른’의 부재를 절실히 느낄 때가 없다. 급격히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나이든 어른들은 그저 세상 쫓아가기도 버거울 뿐이다. 오죽하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성세대들의 고리타분함과 꼰대 기질을 꼬집는 ‘라떼 이즈 홀스(latte is horse, 나 때는 말이지라고 말하는 것을 빗댄 표현)’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을까.
정치에서든, 경제에서든, 사회에서든 대립과 갈등이 커질수록 어른 부재에 대한 갈증이 커질수밖에 없다. 이투데이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를 찾은 것도 그가 얼마남지 않은 존경받는 큰 어른이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학자이면서도 건설부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며, 지금까지도 한은 직원들 사이에서 역대 총재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그의 경제철학은 요즘 젊은이들을 압도하는 개혁적 성향이 묻어나 있다. 중앙대 교수로 사회 초년 시절을 보내던 시절 집에 들었던 강도에게조차 후한 대접을 했던 그는 2010년 5억 원, 2018년 3억 원, 2019년 7억 원 등 모교와 김대중평화센터에 통 큰 기부를 했다. 최근에도 전 재산 10억 원을 모교인 백석초등학교에 기부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2차 확산으로 박 전 총재를 다시 만날 기회를 놓쳐 못내 아쉽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경제 현안에 대한 진단과 대안은 마치 눈에 낀 눈꼽이 떨어지는 것마냥 혜안(慧眼)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요즘 어딜 가나 부동산과 주식 이야기가 화두다. 최근엔 ‘영끌’과 ‘빚투’라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다. 이 같은 현상이 왜 벌어지고 있다고 보는가.
“젊은 세대들은 지금 앞길이 꽉 막힌 사회 환경에 살고 있다. 기업투자가 감소하니 고용도 감소할 수밖에 없고, 생산이 로봇이나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니 사람 손을 점점 떠나게 됐다. 내 집 마련의 경우 부모가 도와주는 사람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평생 어렵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고, 그 결과 젊은이들이 가지게 된 절박함은 어떻게든 자산을 형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저금리 상황이다 보니, 목돈이 없는 사람도 빚을 내서 종잣돈을 마련해 재산을 형성해보려 한다. 유동성이 과잉 공급돼 주가가 세계적으로 오르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빚을 내서 주식을 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가·기업 나서 투자·고용창출
4차 산업혁명·그린뉴딜 활용을
-코로나19로 취업 기회마저 줄어드는 상황에서 청년층을 위해 필요한 정책은 무엇이 있나.
“젊은 세대에 막힌 사회 환경은 앞으로 갈수록 심화할 것이다. 국가가 떠맡아서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우선 일자리 마련에 국가와 기업이 모두 나서야 한다. 특히 기업투자를 늘려서 고용을 창출하도록 기업과 정부가 나서야 한다. 다음으로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실업보험을 전 국민화해야 하고, 거기서 나오는 보험 지급으로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로 국민연금으로 노후보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선진국처럼 목돈 마련 없이 연금만으로도 노후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끝으로 주거문제에 대해선 정부가 공공임대주택을 대규모로 건설해 젊은이들이 집을 사지 않고도 주택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주택을 소유하지 않고 임대해 거주하는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하는 사회질서가 정착돼야 할 것이다.”
-기업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했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를 찾는 것이다.
“기업투자를 늘리려면 걸림돌은 제거해야 하고, 투자에서 수익성이 나올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우선 걸림돌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규제와 강성노조다. 사실 이 두 가지가 대단히 중요한데, 지금 정부가 이 부분에서 성과가 별로 없다고 본다. 수익성이 예상되는, 투자할 곳을 마련하는 문제는 정부가 이번에 4차 산업혁명과 그린뉴딜 정책을 제시했기 때문에 이를 잘 활용하면 그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늘 우리나라가 부동산 중심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해방 후 수십 년간 인플레 시대를 살았다. 그때 부동산이 확실한 저축 수단이 됐고, ‘부동산 불패’ 질서가 형성됐다. 가계 자산 구성을 보면, 부동산과 금융자산의 가계저축 비율이 선진국은 대체로 3대 7인 데 반해 우리는 8대 2다. 이게 바로 부동산 중심 사회라는 것이다. 지난 50년간 물가는 30배 올랐는데 부동산 값은 3000배 올라서 지금 우리가 겪는 빈부 격차, 부의 세습, 빈곤화 성장(경제가 성장해도 가난한) 문제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영원히 한국은 고소득·저생활국, 즉 소득이 높아져도 국민생활은 낮은 나라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집값 문제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이번 정부가 매우 강력한 부동산 안정대책을 내 놓았는데 이것으로 집값이 잡힐 것으로 보나.
“현재 집값 문제는 공급이 아닌 투기 수요 문제다. 우선 주택보급률은 100%가 넘는다. 특히 중요한 건 우리나라 다주택자가 소유한 주택 수가 전체 주택의 60%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주택 대부분이 소위 이재 목적 수요로 정의되고 있다는 건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이 같은 현상은 보유비용이 낮아서다. 선진국 보유세는 주택가격의 1~3%다. 반면 한국은 선진국 보유세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다주택자에 대한 보유세를 인상한 이번 정책은 매우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 효과가 한두 달 뒤엔 나타나기 시작해 집값은 하락 안정세로 갈 것으로 본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속적인 대응책이 뒤따라야 한다.”
집값 문제, 투기수요 잡아야
모든 주택에 보유세 부과를
-부동산값이 폭등하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같은 불황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참고해야 할 일본의 경험은 어떤 것인가.
“1980년대 후반 일본은 경기부양을 위해서 저금리 무제한 유동성 공급정책을 썼다. 그 결과 자산 가격에 거품이 생겼다. 주가와 부동산값은 1986~89년 대체로 3배가 뛰었다. 부득이 1990년부터 금리 인상과 통화긴축 정책으로 선회했다. 이렇게 정책이 바뀌게 되면서 부동산값은 수년 사이 5분의 1로, 주가도 3분의 1로 폭락했다. 이것이 대출 부실로 나타나 금융 시스템이 붕괴됐다. 이어 일본 장기 불황으로 나타났다. 지금 일본은 인구가 매년 30만~40만 명씩 감소해 빈 집이 1000만 채가 넘고, 이것은 도쿄 수도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집값 폭등으로 고생하지만 10년 뒤 일본처럼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10년 뒤 한국도 추세적 집값 하락 문제에 당면할 것이다. 우리도 본격적인 인구 감소 단계에 들어갔고, 수년 뒤엔 GTX가 개통돼 서울에서 살지 않아도 출퇴근이 가능하게 된다. 집을 사는 것보다 임대하는 것이 정상인 시대적 질서가 정착될 것이다.”
-집값 안정을 위한 대책은 어떤 방향으로 접근해야 하나.
“우선 수요 면에선 보유세를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이번에 보유세가 많이 올랐지만, 앞으로 1가구 1주택을 포함해서 모든 주택에 대해 지금보다 현저히 높은 수준으로 가야만 선진국 수준이 될 것이다. 동시에 지방세로 돼 있는 재산세와 취득세를 국세화해 중앙정부가 종부세와 함께 주택보유과세를 통제해야 한다. 공급 면의 경우, 공공임대 주택을 대규모로 공급해 젊은이들에게 공급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큰 흐름에서 방향은 옳으나 함량이 미흡하고, 지속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1가구 1주택자를 포함한 보유과세 강화를 두고선 지금도 반발이 많은데.
“그게 문제다. 국민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집에 대해 보유세를 부과하는 건 1가구냐 2가구냐 문제가 아니다. 고가의 집을 가지면 누구든지 집 자체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미국은 1가구 1주택 등을 구분하지 않는다. 비싼 집을 가지면 마땅히 세금을 많이 내고, 그 대신 연금을 선진화해서 노후엔 연금을 타서 생활하자는 것이다. 1가구 1주택은 보유세를 적게 내도 된다는 건 한국적 사고 방식이다. 길게 보면 절대 그래선 안 된다.”
-부동산이나 주식시장 등 자산시장이 실물경제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자산시장이 버블이라고 보는지.
“저금리와 유동성 공급은 전례 없는 현상이다. 이로 인해 이미 자산 거품은 초입 단계에 들어섰다고 본다.”
소득세보다 보유세 더 늘려야
부유층 재산 절반 기부했으면
-4차 추경에 따라 정부가 추정한 국가채무 비율은 GDP 대비 43.9%에 달한다. 일각에선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지금은 비상 상황이기 때문에 4차 추경이나 2차 재난지원금이 필요하다. 이에 재정건전성을 어느 정도 훼손하는 건 불가피하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일본은 240%, 미국은 103%, 선진국 평균 120%라는 것을 감안할 때, 아직 우리 재정은 건전하다. 지금처럼 급할 땐 당겨쓰고, 경제가 좋아지면 그때 흑자재정을 통해 건전하게 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 재정건전성을 위한 증세는 불가피하다. 우리나라는 아직 과세율이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기 때문에 증세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다만 증세할 경우 그 방향은 소득세보다 보유세를 더 늘리는 방향으로 해서 양극화를 해소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
-2~3년 내 기준금리를 잠재성장률 수준인 연 2~3%까지 올려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내년 중 코로나19 사태가 완전히 수습된다는 전제하에, 내후년부터 경제가 정상 성장을 한다면 2023년 안에 금리는 2~3% 수준까지는 올려야 하지 않을까 본다. 그럴 경우 부동산, 주식시장, 가계부채, 금융안정 등 문제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사전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우리 경제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지금은 경제성장 환경의 대변혁기다. 즉, 수출주도형에서 내수주도형 성장으로의 변혁, 그리고 제조업 성장에서 4차 산업 주도로의 변혁, 나아가 고실업시대와 양극화 확대 시대, 저성장 시대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다. 이런 구조 변화에 대응해서 경제는 큰 정부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이런 문제에 대응하고 소득재분배를 확대하고, 양극화를 조정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연간 기준으로 보면 문재인 정부도 사실상 내년이 마지막 해다. 그간의 경제적 성과를 평가한다면.
“그동안 정부가 추진해온 정책방향, 즉 소득주도, 공정경제, 혁신성장 정책은 큰 흐름에서 옳다고 본다. 또 상당부분 효과도 있었다. 특히 가계소득을 지원하는 정책, 각종 복지확대 정책, 4차 산업 육성 정책, 그린뉴딜 청사진 제시 등은 나름대로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추진방법에 있어 너무 원리주의적이다. 그래서 실사구시의 실용성이 부족한 게 문제다. 앞으로 시장과 현장 중점의 합리적 실용적 정책 유지 등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8월 전 재산 10억 원을 모교에 기부하는 등 통 큰 기부를 해오고 있다. 아울러 부유층에게 재산 절반만 상속하자고 말씀하셨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만 잘살면 되는 경쟁사회다. 이 때문에 빈부격차가 커지고 사회갈등은 확대되고 있는데, 이대로 가면 우리나라 자본주의는 도덕성이 없는 천민자본주의로 갈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 결과에 스스로 책임지는 질서인데, 이 질서를 훼손하는 게 부의 세습 문제다. 함께 잘 사는 자본주의 사회를 이룩하려면, 자본주의에서 최고 계층인 부유층이 소외계층을 배려해야 한다. 내 재산을 다섯 자식에게 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취지 역시 그런 데 있다. 부유층일수록 재산의 절반은 상속하지 말고 사회에 기부했으면 좋겠다.”
<박승 전 총재는>
1936년 전라북도 김제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뉴욕주립대 올버니캠퍼스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한국은행에 입행했다.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 한국경제고문단장을 맡았으며 1988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다. 같은 해 12월 22대 건설부 장관에 임명됐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주택공사 이사장을, 1999년부터 이듬해까지 29대 한국경제학회 회장직을 역임했다. 2001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을 맡은 후 2002년 다시 한국은행으로 돌아와 22대 총재직에 올랐다. 현재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하나금융그룹의 사회공헌위원장직을 맡아 보육사업과 청년 일자리 창출, 소외계층 지원 등의 업무를 도맡고 있다.
대담 = 김남현 부장, 정리 = 고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