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회장의 ‘빅배스’ 행보…경영권 승계 앞둔 CJㆍGS 등도 이어지나

입력 2020-10-20 15:46 수정 2020-10-2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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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재계에선 오너 3ㆍ4세 중심의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 젊은 경영으로 변화와 혁신을 도모해 저성장 국면을 타개하겠다는 의지의 행보다. 증권가와 재계에선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적자 요인을 한 번에 털어내는 ‘빅배스(Big Bath)’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빅배스는 “목욕을 철저히 해서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에서 유래한 말이다. 새로 부임하는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전임자 재임 기간에 누적됐던 손실이나 향후 잠재 부실요소까지 반영해 회계장부에서 한꺼번에 털어버리면서 실적 부진의 책임을 전임자에게 떠넘길 수 있다는 효과가 있다.

정의선, 현대차 3세 경영시대 개막...“정리하고 가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세타2 엔진’의 리콜(시정조치) 등과 관련해 약 3조3600억 원의 품질비용을 올 3분기 실적에 반영하겠다고 19일 공시를 통해 밝혔다. 대상 엔진은 2011년부터 2018년까지 판매된 세타2 GDI·MPI·HEV 엔진과 감마 GDI, 누우 GDI 등이다.

이번 비용 반영을 두고, 시장에선 경영권 교체 시점을 고려한 ‘빅배스’라는 해석을 제기했다. 지난해 이어 올해 현대차 그룹이 ‘수조 원’의 비용을 다시 반영하겠다고 나서면서다. 작년 3분기에도 현대ㆍ기아차는 세타 엔진 탑재 차량의 엔진 평생 보증 프로그램 시행과 엔진진동감지시스템(KSDS) 장착으로 약 9000억 원의 비용을 반영한 바가 있다.

정의선 회장이 취임 후 가시적 실적 개선을 보여주기 위해 2015년부터 문제가 된 세타2 직분사(GDi) 엔진의 논란을 해소하고 선제적으로 적자 요인을 털고 간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재계에선 역대 경영인이 취임할 때마다 대규모 빅배스를 단행해왔다. 전임자 시절에 쌓인 적자 요인을 한꺼번에 털어내면서 새로운 경영인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오너가 없는 기업인 포스코도 역시 매번 새 경영인이 취임할 때마다 같은 패턴의 회계처리 관행을 보여왔다.

재계 한 관계자는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오너들이 단기 업적 주의에 매몰되다 보면 취임 초기 대규모 적자를 낸 뒤 얼마 동안 흑자 행진을 이어가는 경우가 있다”면서 “회계 장부 효과로 실적 개선을 증명하려는 모럴해저드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대규모 비용 발생에 따른 어닝 쇼크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선제적 위험관리’ 측면에선 긍정적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위험요소를 일시에 제거하면서 실적 턴어라운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경영권 승계 본격화한 재벌 그룹, 빅배스 할까
최근 주요 그룹사들은 오너 3ㆍ4세들의 경영 승계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재계에선 CJ, GS, LS 등 주요 그룹사들도 경영 승계 과정에서 ‘빅배스’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관측하고 있다. 또한, 전문가들은 그룹 내 오랫동안 적자를 지속하거나 부실한 계열사가 빅배스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한진그룹은 지난해 4월부터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경영을 지휘하면서 세대교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시장 생존을 위해 알짜 사업부인 기내식·기내 면세 사업부를 과감히 매각하는 등 과감한 재무구조개선도 진행 중이다.

실재 올해 경영 승계를 진행한 한세예스24그룹인 경우, 빅배스를 발판으로 오너 일가 밀어주기를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앞서 작년 말,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의 막내딸인 김지원 씨가 한세엠케이 대표 자리에 오르면서다. 같은 시기 한세엠케이가 지난해 대규모 적자(당기순손실 455억 원)를 기록했다고 밝히자 시장에선 김지원 대표의 승진에 발맞춘 ‘빅배스’가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빅배스, 주가에 미친 영향은?
일회성 비용이라도 해도 기업의 대규모 손실은 투자자에게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단기적 실적 부진이 주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현대차 역시 대규모 비용 발생으로 증권가에선 실적 및 주가 전망 추이를 하향 조정했다. 20일 현대차는 전 거래일 대비 500원(0.3%) 내린 16만7500원에 장을 마쳤다.

2016년 박용만 두산그룹 전 회장은 큰 조카인 박정원 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넘기면서 빅배스를 단행한 바가 있다. 빅배스 당시 2015년 두산그룹이 당기순손실 1조7008억 원을 기록하자 두산중공업의 주가는 2015년 2만6001원에서 2016년 1월 1만1098원까지 반토막 넘게 내려갔다.

▲연도별 빅배스 기업의 평균 주가상승률(코스피 대비). (자료제공=신한금융투자)
▲연도별 빅배스 기업의 평균 주가상승률(코스피 대비). (자료제공=신한금융투자)

실제 빅배스를 단행한 대부분의 기업이 코스피 대비 큰 폭으로 밑돌았다는 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신한금융투자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빅배스를 단행한 기업들의 연도별 평균 주가 상승률(코스피 대비)은 -12.6%p로 집계됐다.

또한, 빅배스 기업이 바로 이익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추가적인 구조조정, 부실 자산 상각 등도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도 뒤따른다.

김상호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지난해 빅배스를 단행한 11개 기업 중 카카오와 SK하이닉스를 제외한 9개 기업이 코스피 수익률을 하회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익 컨센서스 변화가 양호할수록 빅배스 기업의 차기 년도 주가는 양호한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결국, 수익률 차별화의 키는 펀더멘탈 개선에 달렸다는 분석이다. 단기적으로 실적 추정치가 감소하겠지만, 대규모 부실을 털었다는 측면에서 장기적으로 재무구조 개선도 기대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시장에선 이를 토대로 근본적인 사업 체질도 바꾼다면 의미 있는 ‘빅배스’가 될 수 있다고 주목하기도 했다.

실제 현대일렉트릭인 경우, 지난해 빅배스를 단행한 이후 올 1월부터 실적 개선을 본격화했다. 이에 주가 역시 오름세를 보이면서 지난 연말 1만850원에서 20일 1만4550원까지 올랐다. 대신증권은 “올 상반기에는 실적 변동성 확대의 원인이었던 일회성비용이 제한적 수준으로 접어들었고, 구조조정 등 비용관리 노력 등도 이어지면서 마진 개선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일각에선 빅배스로 낮아진 기업 중 ‘펀더멘탈’이 양호한 기업을 눈여겨보라는 조언을 내놓기도 한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경영권 이양 초 ‘빅 배스’ 효과로 기업 실적이나 주가가 일시적으로 악화하는 사례가 많았다”며 “CEO 교체 후 실적 개선이 가시화될 가능성이 적잖은 만큼 중장기 투자자라면 저가 매수 기회로 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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