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별세] ‘도전과 혁신의 아이콘’ 이건희, 국가 경제 반석 놓고 역사 속으로

입력 2020-10-2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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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이끈 이건희<사진>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영면(永眠)했다. 1987년 이 회장 취임 당시 10조 원이었던 삼성전자 매출액은 2018년 말 387조 원으로 약 39배 늘었으며, 이익은 2000억 원에서 72조 원으로 259배,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 원에서 396조 원으로 무려 396배나 증가했다. ‘이건희’였기에 창조 가능했던 ‘신화’다.

1987년 12월 1일. 서울 순화동 호암아트홀에 모인 1500여 명이 미동도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무대 중앙엔 비장한 표정을 한 다부진 체격의 젊은 사업가가 서 있다. 이건희 회장이 경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이 회장은 46세의 젊은 나이에 국내 최고 그룹인 삼성의 수장으로 추대됐다. 장자 승계가 당시 일반적인 분위기였지만 고(故) 이병철 창업주는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막내아들인 이 회장이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결정한 배경은 뭘까.

이 회장은 이 창업주와 비슷한 모습이 많은 것으로 회자된다. 그중 추진력과 집념, 일에 대한 고집은 아버지를 넘어설 정도라는 평가다. 관심 분야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드는 습관은 그를 전문가에 준하는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이건희 회장이 1987년 회장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1987년 회장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일례로 이 회장은 20여 년 전 D램 반도체 기술이 두 가지 방식으로 양분됐을 때 도시바, NEC 등 주요 반도체기업이 사용한 ‘트렌치’가 아닌 ‘스택’을 선택했다. 스택 방식은 웨이퍼 표면을 파내고 지하층을 만든 후 셀을 쌓는 복잡한 트랜치와 달리 웨이퍼 위에 바로 셀을 적층, 고집적화에 유리하다. 당시 이 회장의 판단이 삼성전자를 오늘날 D램 반도체 1위로 끌어올린 디딤돌이 됐다. 특히 반도체가 한국 경제를 이끄는 효자 산업인 점을 고려하면 단순한 이윤 추구가 아닌 미래를 예측한 결단이었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 반도체가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이 회장은 경영에 있어 동물적인 감각을 보였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삼성그룹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이 회장은 그해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각각 나뉘어 있던 가전, 반도체, 휴대폰 계열사를 삼성전자의 한 지붕 아래 들이는 등 사업 구조를 뜯어고쳤다. 이 회장이 삼성의 지휘봉을 잡은 지 4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1977년 삼성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이후 10년간 경영 수업을 받으며 초일류 삼성 도약의 해법을 차근차근 마련한 것이다.

‘포스트 이병철’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이 회장은 세계 1등 기업을 만들기 위한 자신만의 ‘플랜’을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이 회장은 평소 말을 아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화두를 던졌다. 이 회장의 한 마디는 그 자체로 돌파구가 됐고, 삼성의 도전과 혁신의 동력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지난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지난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1993년 6월 7일 이 회장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대표적이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27년 전 이 회장이 작심한 듯 내뱉은 이 말은 삼성의 혁신과 성장에 버팀목이 됐다. 이 회장은 17일간 회의를 진행하면서 현지에 소집한 200여 명의 경영진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취임 후 6년간의 침묵을 깬, 새로운 삼성을 만들기 위한 서곡이었다.

이 회장의 장기적인 그룹 개혁 로드맵은 오랜 시간을 두고 지속됐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2년 후인 1995년 3월에는 이른바 ‘휴대폰 화형식’을 통해 임직원 모두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이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 무선전화기 제품 불량률이 10%를 넘자 시중에 유통되는 10만 대 이상, 당시 기준 약 500억 원어치의 휴대폰을 수거해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고, 2000여 명의 임직원이 보는 앞에서 모두 태워버렸다. 이 사건은 훗날 ‘품질의 삼성’을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이 회장도 1990년대 후반 일어난 국가적 경제 재앙(IMF 외환위기)을 피할 수 없었다. 이 회장은 그러나 발 빠른 대처로 충격을 최소화했다. 1998년 11월 21일 구조조정위원회를 구성, 5일 만에 30% 인력 감축, 50% 비용절감 등의 내용을 담은 뼈를 깎는 경영체질 혁신방안을 마련했다. 더불어 삼성전자, 삼성생명 등 핵심 계열사를 제외한 모든 회사를 포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구조조정을 시행했다.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삼성은 국내 대기업 가운데 그나마 가장 적은 타격을 입었다.

이 같은 노력을 통해 삼성은 1997년 한국경제가 맞은 사상 초유의 IMF 외환위기와 2009년 금융 위기 속에서도 성장했다. 2020년 브랜드 가치는 623억 달러로 글로벌 5위를 차지했고 스마트폰, TV, 메모리반도체 등 20개 품목에서 월드베스트 상품을 기록하는 등 명실공히 세계 일류기업으로 도약했다.

▲2010년 1월 이건희 회장의 미국 라스베이거스 가전전시회(CES 2010)에 참석하고 있다. 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연합뉴스)
▲2010년 1월 이건희 회장의 미국 라스베이거스 가전전시회(CES 2010)에 참석하고 있다. 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연합뉴스)

이 회장은 ‘삼성 특검’ 여파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2년 만인 2010년 3월 24일 복귀 일성으로 “지금이 진짜 위기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나가자”며 ‘속도 경영’을 강조했다.

이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첫해, 삼성은 태양전지, 자동차용 배터리, 발광다이오드(LED), 바이오제약, 의료기기 등 5대 신수종 사업을 선정해 발표했다. 이들 사업에 2020년까지 23조3000억 원을 투자해 50조 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방침도 세웠다. 이는 글로벌 1등 신화를 쓴 스마트폰의 경쟁력을 이을 새로운 사업을 육성하려는 이 회장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이 회장은 2011년 삼성의 조직에도 큰 변화를 줬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을 부활시키고, 이듬해 최지성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을 실장으로 발탁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스마트폰 사업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최 부회장은 삼성 내에서도 입지전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위기 때마다 정면 돌파한 이 회장 특유의 경영 스타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회장은 병환으로 쓰러지기 전인 2014년 초 신년하례식에서 사업 전략부터 기업문화까지 모든 것을 바꾸라는 특명을 내렸다. 프랑크푸르트 신경영을 선언한 지 21년 만에 나온 고강도 혁신 선언이다. 이 회장은 이날 “신경영 20년간 글로벌 1등이 된 사업도 있고, 제자리걸음인 사업도 있다”면서 “선두사업은 끊임없이 추격을 받고 있고 부진한 사업은 시간이 없다. 다시 한번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의 최대 고민에 대한 해법을 ‘변화’와 ‘혁신’을 통해 찾길 주문한 것이다. 변화와 혁신은 이 회장이 그토록 강조한 '마하 경영'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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