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정부의 기업대출 압박에 "내코가 석자"

입력 2008-11-2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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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대출 압박에 "부실 책임질 거냐" 볼멘소리

최근 중소기업 대출 확대하라는 정부의 압박이 더욱 거세지면서 은행권의 불만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는 정부가 ‘건전성 강화’와 ‘대출 확대’라는 상반된 주문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중소기업들을 적극 지원하라는 정부의 취지는 십분 이해하지만, 리스크 관리 역시 강화해야 하는 은행들로서는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급격한 경기침체로 리스크관리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에서 기업 대출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금융권에 대해 마치 '부도덕한 집단'처럼 몰아가는 행태에는 어이가 없다 못해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정부 中企대출 압박에 '난색'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은행에 대해 압박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4일 무역투자진흥확대회의에서 “돈이 필요 없을 때는 갖다 쓰라면서 정작 필요한 때는 안면을 바꾸다”고 질책했고, 10일 중소기업대책회의에서는 “일선에서 은행이 필요한 돈을 제때 풀어주고 있는지 걱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17일에도 “은행은 마른 논에 물을 대듯 필요한 곳에 저금리로 자금을 공급해 주기를 간곡히 바란다”며 사실성 최후통첩을 했으며, 여기에 기획재정부장관과 금융위원장 등 경제부처 장관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매일같이 ‘경고성’ 발언이 쏟아지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정부가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재차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이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은행의 수익성과 건전성이 동반 악화되면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에도 급급한 실정이다.

실제로 하나은행은 태산LCD 등 파생상품 관련 손실로 대손충당금을 2507억원이나 반영하면서 지난 3분기 하나금융지주의 순익이 사상 처음으로 733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KB금융지주는 국민은행의 지주전환 당시 보유하게 된 자사주의 영향으로 BIS비율이 9.76%로 하락한 상태이며, 외환은행도 3분기 BIS비율(바젤Ⅰ기준)이 10.6%로 전분기(11.56%)보다 크게 악화되어 10%대를 간신히 유지했으나 바젤Ⅱ 기준으로는 10%대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게 금융권의 관측이다.

우리은행과 기업은행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최근 몇 년 동안 상대적으로 기업 대출에 적극적이었던 우리은행은 건설업계와 조선업계가 극심한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서 주름살이 더욱 깊어지고 있으며, 기업은행도 대기업 부도시 연쇄부도의 가능성이 높은 중소 협력업체에 대한 여신이 구조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리스크를 떠안고 있는 실정이다.

은행권 전체로는 올 3분기 누적순익이 당기순이익이 8조4000억원으로 전년동기(13조2000억원)보다 36%나 급감한 반면, 부실채권비율(고정이하여신비율)은 0.81% 수준으로 전년말(0.72%)대비 0.09%p나 상승해 자산건전성이 크게 악화된 실정이다.

한 시중은행의 기획담당 부행장은 “은행의 수익성과 건전성이 악화되면서 당장 BIS비율을 맞추기에도 급급한 실정”이라면서 “정부와 재계의 요구대로 신규 대출을 대폭 확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특히 “BIS비율 새 기준인 바젤Ⅱ 의무 도입을 1년 연기한 것은 은행들로 하여금 기업 대출을 강요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많은 예산을 들여 준비해 온 은행들로서는 이같은 ‘고무줄식’ 정책은 전혀 반갑지 않다”고 비판했다.

◆우량기업 '선별적 지원' 불가피

이같은 금융권의 현실을 감안할 때 무조건적인 대출 강요하기 보다는 우량기업을 중심으로 한 선별적 지원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는 게 은행권의 인식이다.

정부의 압박으로 은행들이 자칫 무리한 대출을 강행할 경우 그에 따른 책임은 결국 은행이 감당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금융회사에 투자한 선의의 투자자들의 피해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대출 강요와 압박은 없어야 한다는 게 은행권의 당연한 요구다.

한 시중은행의 여신담당 부행장은 “개별 거래기업에 대해서는 일선 지점장이 제일 잘 안다”면서 “성장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신속한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마저 살리겠다고 무리한 대출을 강행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그것은 선량한 투자자와 고객들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철저한 대출 심사를 통해 우량기업을 중심으로 선별적인 지원이 불가피하다는 것.

그러나 대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금융권에서는 정부가 기업 대출에 대해 한시적으로 보증한도를 확대해 주는 것과 대출 담당자에 대한 면책을 보장하는 방안 등이 집중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대출은 살아날 수 있으나 은행의 부실은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전자가 보다 바람직한 해법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정부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보증기관의 중소기업 대출 보증비율을 한시적으로 100%까지 확대해 주는 방안이 적극 검토되고 있다.

한시적이나마 이같은 조치가 취해진다면 은행의 대출 ‘문턱’도 다소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 시중은행의 여신담당 관계자는 “한시적이라도 보증비율을 100%까지 늘려준다면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더불어 여신 담당자에 대한 한시적인 면책도 적극 검토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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