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김치종주국’ 우리만 외친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입력 2020-11-30 18:47 수정 2020-12-0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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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자국의 김치 제조법을 국제 표준단체인 국제표준화기구(ISO) 표준에 맞춰 제정했다고 환구시보(環球時報)가 보도하면서 김치 종주국 논란이 일었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매체임을 감안해야겠지만 환구시보는 “중국이 주도해 김치 산업의 6개 식품 국제 표준을 제정했고, 이번 ISO 인가 획득으로 김치 종주국인 한국은 굴욕을 당했다”고 전했다.

일부 국내 언론은 중국 현지 특파원들의 보도를 전하면서 중국의 ‘김치 공정’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그러자 농림축산식품부는 설명자료를 통해 중국 측의 오류와 억지주장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농식품부는 “우리 김치(Kimchi)에 관한 식품규격은 2001년 유엔 국제식량농업기구(FAO) 산하 국제식품규격위원회에서 회원국들이 이미 국제 표준으로 정한 바 있다”며 “이번에 ISO 제정 내용은 쓰촨의 염장채소인 파오차이에 관한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이 제기한 ‘원조’ 논란은 이미 19년 전 끝난 사안이라는 얘기다.

물론 한국의 김치가 사스에 이어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에도 전 세계적으로 면역력을 높이는 식품으로 주목받으면서 생겨난 해프닝일 거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이 남는 건 사실이다. 김치 종주국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2009년 이래 지난해까지 10년 연속 김치 무역 적자를 기록해왔다. 김치 수입량이 수출량보다 5배 가량 많은 데다 수입물량의 99% 이상이 중국산인 점은 중국에 ‘김치 공정’의 빌미를 제공할 만하기 때문이다. 올해의 경우 코로나19로 중국산 수입이 줄고 해외 김치 수요 증가로 수출은 늘어 무역 역조가 상당히 해소되고 있지만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일본과도 오랫동안 ‘기무치’로 논쟁을 벌여온 바 있고 이미 한국 김치 시장에 물밀듯이 밀고 들어온 중국마저 이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인 만큼 우리만 종주국을 외친다고 종주국 지위가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음식 종주국을 빼앗긴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보통 위스키 하면 스카치 위스키를 떠올리지만 원조는 아일랜드다. 1171년 잉글랜드 헨리 2세의 군대가 아일랜드에 갔을 때 이곳 주민들이 아스키보(‘생명수’라는 뜻)라는 증류주를 마시고 있었고, 이 술이 위스키의 선조가 됐다. 오래전 스카치 위스키 업체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를 방문했을 때 그 업체 마케팅 임원은 “위스키를 만든 나라는 아일랜드이지만 지금은 스카치 위스키가 세계 최고”라며 “아일랜드인들이 스코틀랜드에 위스키를 전해준 게 최대 실수”라는 농담을 했다.

와인 역시 비슷하다. 프랑스 와인이 세계 최고의 와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와인의 종주국은 이탈리아다. 고대 로마 시대 기원전 800년부터 지금의 토스카나 지방에서 포도를 재배해 3000년의 와인 역사를 자랑한다. 로마의 줄리우스 카이사르가 프랑스의 옛 땅인 갈리아를 정복한 후 포도나무를 심고 양조 기술을 보급한 덕택에 오늘날 프랑스가 와인 종주국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의 김치 연간 소비량은 180만 톤(2018년 기준)으로 추산되는데 중국산 김치가 30만 톤씩 수입되고 있고 코로나19 같은 특수상황이 없다면 계속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이 다른 산업에서 보여온 ‘굴기’를 감안할 때 물량과 가격 경쟁력으로 무장해 코로나19 이후 위상이 높아진 김치를 다른 나라에까지 수출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농식품부는 올해 처음으로 11월 22일 ‘김치의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고 기념식까지 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까지 참석한 이 자리에서 김현수 장관은 “앞으로도 민간과 계속 협력해 김치 종주국의 위상을 더욱 높여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한 게 불과 며칠 전 일이다. 농식품부는 김치의날 기념식 같은 보여주기 행사 말고 이번 기회에 농가와 김치 제조 기업들에 생산과 수출 등의 정책적인 도움을 충분히 고민했는지 궁금하다.

김치는 단순히 음식만의 의미가 아니다. K팝, K드라마에 버금갈 만한 ‘K소프트파워’의 핵심이다. 김치산업을 프랑스의 와인·영국의 위스키·덴마크의 치즈산업 같은 국가전략 산업으로 지원하고 육성할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한국이 김치의 표준’이라는 구호와 자부심에만 사로잡혀 있다가는 야금야금 뚫리고 있는 구멍에 김치 종주국이라는 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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