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의 설움①] 작을 때가 좋았다

입력 2020-12-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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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견기업인 자동차 부품업체 A사는 최근 제1금융권에서 대출 만기 연장을 해야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로나19로 피해가 발생한 중소기업·소상공인은 내년 3월31일까지 대출 만기와 이자 납부 유예를 받을 수 있지만 중견기업은 대상이 아니다. 보증금액도 너무 적다. 신용보증기금 기업 당 보증 최고한도는 30억 원밖에 안 된다. A 회사 대표는 한숨만 내쉬었다.

#2. 부품 제조를 전통적으로 했던 중견기업 B사는 중소기업 시절 연구개발(R&D) 자금을 지원받아 정부 공공사업에 참여하면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중견기업이 된 이후에 공공조달시장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회사 매출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중견기업이 되니 되레 살 길이 막막해 졌다”며 “해결해야 할 규제만 산더미같은 중견기업이 되다보니 오히려 부담만 더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 경제의 ‘허리’를 담당하는 중견기업이 신음하고 있다. 엄격한 규제와 지원 사각지대에 놓이면서 몸집을 줄여서라도 중소기업으로 회귀하려는 곳이 적지 않다. 주력 산업을 이끄는 기업들이 성장을 꺼리면서 생태계도 흔들리고 있다. 성장 사다리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7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중견기업 47개사, 2018년과 2017년 각각 89개사, 40개사가 중소기업으로 회귀했다. 글로벌 진출을 꿈꾸며 중견기업으로 힘겹게 올라왔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업을 매각하거나 규모를 축소한 기업들이 매년 등장하고 있다.

이 배경에는 ‘규제’가 있다. 중견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이동할 경우 개별 제도나 법령 등을 포함해 현행 규제가 40여 개 늘어난다. 동시에 없어지거나 축소되는 지원은 230개에 달한다. 가령 중소기업특별세액감면을 비롯해 신기술인증, 기술검증 등과 관련된 연구개발 지원은 중소기업에만 해당하기 때문에 중견기업이 된 순간부터 끊긴다. 무역보험이나 기술보증, 융자 등 정책금융도 활용할 수 없게 된다. 반면 공공조달 시장 진입이 금지되고, 중소기업 적합업종에 진출할 수 없게 되고, 공정거래법과 상생협력법, 금융그룹감독법 등 각종 법 적용을 받는다. 특히 당기 소득에서 투자와 상생협력출연금을 차감한 금액(유보금 등)이 소득의 65%에 미달할 경우 법인세를 부과해야한다는 ‘조세특례제한법’ 규제는 중견기업을 숨막히게 하고 있다. 중견기업은 매출액 증가율이 낮아 내부 유보자금 비중이 65.2%로 높은데, 이에 대한 징벌적 과세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 외에도 외국인 고용허가가 제한적인 것 역시 대표적인 역차별 규제로 꼽힌다. 가업 승계도 중견기업 지속 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정부가 가업 승계를 부(富)의 대물림으로 인식해 최고 65%의 세금을 매기고 있어서다. 승계 이후엔 10년간 업종을 바꿀 수 없고, 정규직 근로자를 120%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

정부 예산 지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연간 R&D 자금은 1조 원이 넘지만 산업통상자원부가 중견기업에 지원하는 예산은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중견기업이 성장을 멈추면서 기업 수와 규모도 수년간 정체 상태다. 현행법상 매출 400억∼1500억 원 이상, 자산총액 5000억∼10조 원 등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중견기업으로 분류된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중견기업은 여전히 4000여 개, 700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강호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은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팬데믹 상황에서 금융 정책의 사각지대에 오랜 기간 방치돼 온 수 많은 중견기업은 일시적 매출 감소와 그에 따른 신용 등급 하락으로 심각한 유동성 문제를 겪고 있다”며 “신용보증기금 보증 한도를 현행 30억 원에서 500억 원으로 상향하고, 초기 중견기업을 우선 지원 대상에 포함시키는 등 금융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해 한국 경제의 ‘허리’인 중견기업의 식어가는 엔진을 다시 돌리는 데 정부, 국회 등 각계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 회장은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고 건강한 성장 사다리가 작동하는 산업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최근 국무총리가 발표한 ‘항아리형 경제, 혁신형 강소·중견기업 성장전략’ 등 과감한 중견기업 중심의 산업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견기업 업체들은 △중견기업에 대한 정부 신용보증기관 지원 확대 △기업상속공제 고용유지 요건 완화 △코로나19 장기화를 고려한 추가 금융지원 등 금융·세제 지원방안을 건의하고 있다. 또 △중견기업에 대한 외국인 고용허가제 완화 △화학 설비 인허가 관련 부처간 중복 문제 해소 △공공건설임대주택 표준건축비 현실화 등의 규제혁신 과제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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