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 함께하는 시간] 염치 있는 식물, 염치없는 식물

입력 2020-12-1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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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일 신구대학교식물원 원장·신구대학교 원예디자인과 교수

어느덧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달이 되었습니다. 식물들도 대부분 치열했던 한 해의 삶을 마무리하고 잠시 휴지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을 찾아보면 모두 생존을 위해서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을 영위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각기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중에, 함께 자라고 있으면 서로서로 생육을 촉진하거나 한 식물이 다른 식물의 생육을 촉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에 있는 식물을 ‘공영식물’이라고 합니다. 동물 상호 간에 또는 식물과 다른 생물 간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공생’과 비슷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영식물의 예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허브의 한 종류로 유명한 캐모마일은 양배추의 생육을 촉진한다고 합니다. 콩과 무를 함께 심으면 무에 생기는 나방 애벌레 같은 해충의 피해가 줄어든다고도 합니다. 고추와 함께 파를 심으면 고추의 생육이 좋아진다는 예도 있습니다.

이렇게 눈에 띄게 도움을 주는 식물들도 있지만, 대부분 식물은 다른 식물들과 경쟁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크게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제각기 일정한 영역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적절한 단어가 무얼까 생각해보니 ‘염치’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염치’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식물들은 염치가 있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겠지요.

간혹 다른 식물들에게 기생하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겨우살이과 식물인 참나무겨우살이, 겨우살이, 꼬리겨우살이, 동백나무겨우살이, 메꽃과 식물인 새삼, 실새삼, 갯실새삼, 그리고 열당과 식물인 야고, 오리나무더부살이, 개종용, 초종용, 가지더부살이 등 3과 12종이 살고 있습니다. 겨우살이과에 속하는 기생식물들은 참나무, 동백나무 등에 기생하고, 야고는 억새에 기생하며 새삼류는 여러 종류의 식물들에 기생하는 등 각기 다른 숙주식물에 기생합니다.

기생식물들은 한마디로 염치가 없습니다. 일반적인 식물은 땅속에 열심히 뿌리를 뻗어가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과 무기양분을 얻고, 에너지원이 되는 양분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 빛을 쫓아 광합성을 합니다. 반면에 기생식물은 광합성은 전혀 하지 않고 모든 영양분을 숙주식물로부터 얻거나 스스로 광합성을 하면서도 다른 식물로부터 영양분을 뺏어옵니다. 이들은 뿌리를 땅에 내리는 대신 숙주식물 조직에 침투하여 숙주식물로부터 영양분과 수분을 얻는 것입니다. 기생식물은 숙주식물로부터 물과 양분을 얻지만, 숙주식물은 기생식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겨우살이나 야고 같은 경우는 숙주식물에 주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미미해서 숙주식물이 견딜 만한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식물들은 기생식물 중에서 그나마 염치가 좀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피해의 정도가 너무 심각해져서 숙주식물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새삼류의 식물이 특히 피해를 많이 주는 식물입니다. 아주 염치가 없는 식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염치 없는 새삼류들은 숙주식물을 죽게 만듦으로써 자기도 양분을 얻을 곳이 없게 되어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염치없음이 심해져 남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식물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좁게는 평범한 우리 주변에, 넓게는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사람 중에도 염치없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저의 눈이 부정적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다른 여러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도 큰 어려움에 빠지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즈음에 지난 1년을 생각해봅니다. 염치없이 남들 앞에 나서고, 글도 쓰고, 내 주장을 앞세우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염치를 좀 되찾아 새로운 날들을 맞이할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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