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위기마다 국민 위로한 한국 골프 여제들
“오늘 내 우승이 누군가에게는 희망과 에너지가 됐으면 좋겠어요.”
미국 무대 첫 도전에 나선 김아림(25)이 US여자오픈 우승을 차지하며 감동을 안겼다. 김아림은 15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챔피언스 골프클럽(파71·6401야드)에서 끝난 제75회 US여자오픈 골프대회에서 최종합계 3언더파 281타로 정상에 올랐다.
첫 US여자오픈 출전에 3라운드까지 선두 시부노 히나코(일본)에 5타 뒤진 공동 9위를 기록하던 김아림은 대회 마지막 날 대역전극을 펼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올해로 75회를 맞은 US여자오픈 최종 라운드에서 5타 차를 뒤집고 우승한 것은 최다 타수 차 역전 타이기록이기도 하다. 대회 이전까지 세계랭킹 94위에 불과했던 김아림은 이날 우승으로 세계랭킹도 30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야말로 골프계 신데렐라가 탄생한 셈이다.
김아림의 우승처럼 그동안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한국 골프 여제들은 메이저 대회 우승 소식으로 위로의 메시지를 던졌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우승이 대표적이다. 당시 박세리는 US여자오픈 우승을 놓고 제니 추아시리폰(태국)과 연장 승부를 펼쳤다. 연장전이 치러진 18번홀(파4)에서 박세리의 티샷이 페어웨이 왼쪽 연못 턱에 걸렸다. 과감하게 양말을 벗고 맨발로 물속에 들어간 박세리는 연못 턱에 걸린 공을 부드러운 스윙으로 쳐냈고, 이 공은 페어웨이에 안착했다. 패배 위기에서 과감한 결단으로 동타를 만들어낸 박세리는 92홀(정규 72홀+연장 18홀+서든데스 2홀)의 긴 승부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20년이 넘도록 ‘맨발 투혼’으로 기억되는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우승은 국민에게 감동 그 자체였고, ‘우리도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는 응원이 됐다.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로 불리는 스포츠가 개인의 영광을 넘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순간이었다.
이후 2008년 박인비, 2009년 지은희의 US여자오픈 우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8년은 미국에서 시작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한 때였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시작해 부동산 시장이 붕괴되고 미국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며 실물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우리나라에도 타격을 입혔고,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에 또다시 맞은 국가적 위기는 국민을 침울하게 했다.
이때 박인비와 지은희의 US여자오픈 우승 소식은 또 한 번 국민에게 위로가 됐다. 10년 전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우승을 보고 골퍼의 꿈을 키운 ‘박세리 키즈’ 박인비는 US여자오픈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다. 이듬해엔 지은희가 US여자오픈 마지막 홀에서 약 7.5m 거리의 버디 퍼트에 성공하며 캔디 궁(대만)을 극적으로 꺾고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연이은 한국 선수의 메이저 대회 우승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한숨만 내쉬던 우리 국민에게 자긍심과 용기를 심어줬다.
김아림의 이날 우승 역시 마찬가지다. 박세리, 박인비, 지은희의 우승만큼이나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됐다. US여자오픈은 애초 세계랭킹 50위까지 본선 직행 티켓을 부여한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예선을 치르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본선 직행 자격을 세계랭킹 75위(올해 3월 16일 기준)로 확대했다. 당시 기준으로 세계랭킹 70위였던 김아림은 가까스로 US여자오픈 출전 자격을 받았고, 처음으로 출전한 US여자오픈 무대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김아림의 이번 우승도 코로나19로 시름에 빠진 국민에게 큰 용기가 되지 않을까. 김아림도 우승 소감으로 국민에게 희망을 담은 바람을 전했다. “지금과 같은 코로나19 시국에 이렇게 경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오늘 내 플레이가 어쩌면 누군가에게 정말 희망이 되고 좋은 에너지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