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권의 글로벌 시각] 바이든 대통령의 약속

입력 2021-01-2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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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핀란드 대사

조 바이든 제46대 미국 대통령이 취임했다. 미국의 이번 정권 이양은 매우 특이했다.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 못지않게 이임하는 대통령의 동정이 세간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떠난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연유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는 모습을 미국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가 긴장된 가운데 지켜보았다. 무슨 불미스러운 소동이나 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백악관을 떠나는 그의 모습은 초라한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현직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에 백악관을 떠나는 것을 기획했다지만 끝은 어디까지나 끝이었다. 그는 앤드루 공군기지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지난 4년간의 치적을 자랑한 뒤에 ‘나는 돌아올 것’이라고 했지만 그 말이 그를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탄 공군 1호기가 플로리다를 향해 이륙하는 순간 공항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My Way)’의 마지막 소절인 ‘I did it my way’가 울려 퍼졌다.

트럼피즘으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현상들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원인(cause)이기보다는 징후(symptom)라는 말이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 미국에 나타난 특이한 현상들은 미국 사회에 누적된 근본적인 모순이나 병리현상에 기인한 것이며 트럼피즘은 이런 근원들이 밖으로 표출된 징후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년 11월 3일 대선 이후 그가 보인 행적, 특히 미국 의회 난입 사건을 전후한 언행과 취임식 날 그가 보인 옹졸한 행태를 보고 나서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플로리다로 떠나기 전 고별 연설에서 열거한 그의 치적들이 사실인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그나마 성과들을 다 까먹었다. 의사당 난입 사건은 그의 지지 기반을 크게 위축시켰다. 그가 워싱턴을 떠나면서 선택한 노랫말 ‘I did it my way’처럼 트럼프피즘은 트럼프의 것이었고 이제 트럼프가 떠났으니 트럼피즘도 미국과 작별을 고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바이든 시대의 과제들은 많은 부분 트럼프 시대에 의해 규정되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150년이 넘는 전통을 깨고 트럼프 대통령은 후임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의 자리가 비어 있는 취임식장의 분위기가 가벼울 수 없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연설 내내 단합, 상호존중, 진실을 강조했다. 그는 단합만이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보수하고(repair) 되돌리고 치유해야 한다고 했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 전면 전쟁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를 존중하자고 했다. 사실이 조작되고 만들어지기까지 하는 문화를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고 지켜보라고 했다. 그러고 난 뒤에도 반대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했다. 평화적으로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가장 큰 힘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내 말을 분명히 들으십시오. 반대가 분열로 가서는 안 됩니다. 나는 약속합니다. 나는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사랑하는 조국을 향한 노정객의 절규처럼 들렸다. 그의 언어들은 평범했지만 시의 적절하고 진지했다. 연설 도중 코로나19 희생자에 대한 묵념은 그가 말한 치유의 시작처럼 보였다.

바이든의 취임식은 연설뿐 아니라 무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매우 상징적이고 시사적이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인종, 성별 등에 있어서 미국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람들로 내각을 꾸렸다. 그의 취임식 무대에 등장한 인물들도 그런 고려가 드러났다. 레이디 가가가 미국 국가를 부르고 흑인 팝 가수 제니퍼 로페즈가 축가를 불렀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른 컨트리 가수 브부룩스는 공화당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청바지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무대에 나타났다. 젊은 흑인 여성 어맨다 고먼이 축시를 낭독했다. 다른 사람들의 팔(arms)을 잡기 위해 무기(arms)를 내려놓자는 운율은 절묘한 것이었다. 그는 노예의 후손이며 싱글맘이 기른 깡마른 흑인 여자 아이가(a skinny black girl) 대통령이 되는 것을 꿈꿀 수 있는 시대라고 말했다. 그에게서 마치 이 시대의 마틴 루서 킹 목사를 보는 듯했다.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그동안 들어왔던 원칙적인 수준으로 말했다. 동맹을 보수하고 힘이 아니라 모범으로 세계를 리드하겠다고 했다. 북한을 포함하여 특정 지역이나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취임식은 늘 엄숙하고 새 지도자는 결의에 차 있다. 그러나 취임식이 끝난 다음 순간에 기다리는 것은 난마처럼 얽혀 있는 현실이다. 트럼프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생채기는 유혈이 낭자하다. 트럼피즘을 영원히 호리병 안에 담아 두려면 바이든 대통령은 그가 취임연설에서 한 말들을 실현해야 한다. 어맨다 고먼을 위해서라도 정부를 미국 국민들의 현실이 맞게 구성한 그의 실험 또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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