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5. 올 연말 정치은퇴 앞둔 메르켈

입력 2021-02-03 17:08 수정 2021-02-05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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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위기 대응…낙오자 보듬고 ‘연대·포용’의 리더십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최장수 총리”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정치 지도자”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이다.

9월 26일 독일 총선이 치러진다. 2005년 11월에 총리로 취임해 네 번이나 독일 정부를 이끌어온 메르켈은 이제 정치무대를 떠난다. 2019년 12월 자신이 이끌어온 집권 여당 기독교민주당(기민당, CDU)의 당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4선을 끝으로 국내나 유럽 정치에서 어떤 직책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라진 나라 동독 출신의, 최초의 여성 총리. 자신을 발탁해준 통일독일의 첫 총리 헬무트 콜(Helmut Kohl, 1982.10.1~1998.10.27 재임)보다 재임 연수가 조금 더 길 듯하여 이제 최장수 총리라는 타이틀마저 거머쥘 듯하다. 그의 정치를 복기해 보는 것은 유럽통합, 나아가 유러피언 드림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것이다.

‘콜의 소녀’…후원자 치고 정상에

메르켈은 1954년 당시 서독 지역인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몇 주 후 목사였던 아버지와 영어교사였던 어머니를 따라 동독으로 이주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실에서 일하던 메르켈은 36세 때 통일을 맞이했다. 1990년 3월 당시 동독 정부는 최초의 민주 선거를 실시했다. 이때 메르켈은 정부의 부대변인으로 일하며 정치 경험을 쌓았다. 이런 경력 덕분에 그는 통일 독일에서 장관이 된, 소수의 동독 출신의 정치가가 됐다.

통일을 완수한 콜 총리는 화합의 정치가 필요했고, 1991년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때 ‘콜의 소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환경부 장관을 거치면서 경력을 쌓았다. 1998년 기민당은 총선에서 패배했다. 동독 출신의 ‘소녀’는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기민당의 사무총장 자리에 올랐다. 기회는 2000년 봄에 왔다. 통일의 총리가 수십 년간 측근을 관리하는 데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운용해 왔기 때문. 콜의 최측근이며 후계자이던 볼프강 쇼이블레(Wolfgang Schauble, 메르켈 정부에서 2009~2017년 재무장관 역임)가 이 스캔들 때문에 물러났다. 그는 후원자였던 콜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기민당 당수가 됐다. 2005년 9월 총선에서 이겨 총리가 됐지만 그때까지 ‘소녀’의 리더십은 별로 드러난 게 없었다. 하지만 위기가 그를 더욱 단련시켰다.

유로존 위기 땐 ‘긴축 처방’ 비판

2010년 5월 그리스는 국제통화기금(IMF)과 단일화폐 유로의 회원국(유로존)으로부터 2400억 유로가 넘는 구제금융을 제공받았다. 이후 유로존 경제위기는 포르투갈과 아일랜드, 스페인 등 ‘피그스(PIGS)’ 국가로 확산됐다. 유로존 최악의 경제위기였다. 당시 독일은 겨우 위기를 극복할 정도만 소극적으로 관여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성장을 동반하지 않는 긴축 위주의 정책 처방을 내린다는 혹독한 비판에 시달렸다. 응급실로 실려온 경제위기의 환자들을 먼저 살려내고 이어 살을 빼게 해야 하는데, 독일은 무엇보다 살부터 빼라고 했다는 것. 피그스 국가들이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여 경제위기를 야기했다는 게 독일의 시각이었다. 그리스는 세 번이나 구제금융을 받고 2018년 겨우 국제자금시장에 복귀했다.

유로존 붕괴 막았지만 ‘연대’의 과제

당시 많은 경제학자들은 유로존 붕괴를 전망했다. 유로존 회원국의 경우 재정정책은 국가가 관리하지만 통화정책은 유럽중앙은행에서 맡고 있다. 유로존에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동떨어져 운영된다. 독일이나 베네룩스 3국 같은 건전한 재정정책을 운영하는 국가와 ‘남유럽’으로 불리는 그리스, 스페인 등의 국가는 재정정책의 건전성이 크게 차이 난다. 이런 간극이 유로존 위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유로존 회원국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항구적인 구제금융체제인 7000억 유로 규모의 유럽안정 메커니즘을 구축했다. 뒤늦고 충분하지 않은 조치였지만 어쨌든 유로존은 붕괴되지 않았다. 독일은 유로존 위기 극복 과정에서 리더로 활동했다. 그러나 위기대응책 마련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됐고 대응책 자체도 부족했다. 위기의 순간에 연대가 쉽지 않았다.

▲앙겔라 메르켈(왼쪽)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7월 18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이틀째 회의 석상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왼쪽)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7월 18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이틀째 회의 석상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유럽경제회생기금 7500억 유로 관철

반면에 코로나19 대응은 아주 신속했고 대응책도 기존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었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수반들은 지난해 7월 중순 정상회담에서 7500억 유로(우리 돈으로 1000조여 원)의 유럽경제회생기금(ERF)에 합의했다. 두 달 전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만나 5000억 유로 규모, 전액 무상의 ERF를 제안했다. 정상회담에서는 무상의 규모가 3900억 유로로 줄었고, 나머지는 저리의 유상 지원으로 합의가 됐다.

독일은 유럽연합 예산의 약 20% 정도를 부담하는 EU 내 최대 경제대국이다. 무상지원의 5분의 1을 독일이 부담해야 한다. 유로존 위기 당시 독일은 이런 제안을 단번에 일축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야기했다. 이 위기에서 과감하고도 적극적인 정책을 제시하여 실행하지 못한다면 경제·정치 블록으로서 EU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상황이었다. 유로존 위기 대응의 미비점을 학습한 메르켈 총리가 최악의 경제위기 앞에서 아주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이를 EU에서 통과시켰다. 기존의 EU 예산 부담보다 훨씬 큰 무상지원을 관철시킨 것은 독일이 그동안 내세웠던 금지선, 곧 ‘레드라인’을 넘은 것이다. 코로나19 대응책은 유로존 위기 때와 비교해보면, 메르켈이 제대로 된 연대감을 보여준 것이다.

기존의 인식 틀을 바꾸는 과감성, 변혁적 리더로

보통 지도자는 거래적(transactional) 리더와 변혁적(transformational) 리더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지도자는 그냥 일상적으로 주어진 국사를 처리하는 거래적 리더이다. 변혁적 리더는 기존의 인식 틀을 바꾸는 과감한 지도자이다. 보통 지도자는 위기를 극복하면서 변혁적 리더로 탈바꿈하곤 한다. 메르켈의 경우도 유로존 위기 당시에는 주어진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앞에서 변혁적 리더로 한발 다가섰다.

지난달 16일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아민 라쉐트(Armin Laschet)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주지사가 신임 당수로 선출됐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 인구가 1800만여 명으로 독일을 구성하는 16개 주 가운데 최대 주이다. 라쉐트 당수는 중도파로 메르켈의 정책을 상당수 계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단 3월이나 4월 집권 여당의 총리 후보가 결정된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라쉐트가 총리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

美·EU 관계개선 등 할 일 남아

어쨌든 16년간 독일 국내 정치와 유럽 무대를 좌우했던 메르켈이 물러난다. 올해 EU는 7500억 유로의 ERF 배분을 두고 또 논란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탈리아 연립정부가 이 문제로 붕괴됐다. ERF 배분은 물론이고 새로 출범한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와 EU와의 관계 개선 등 9월 총선 때까지 아직도 메르켈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유러피언 드림은 개인주의보다 연대를 우선한다. 낙오자나 낙오된 국가를 보듬고 서로 어깨를 기대게 한다. 메르켈은 몇 차례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EU 회원국 간의 연대와 포용을 실천했다. 우리나라나 세계 모든 나라의 시민들은 제대로 일하는 지도자를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존경받는 리더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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