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여 따르라’던 부르짖음 어디가고… 백기완 선생 별세

입력 2021-02-15 15:50 수정 2021-04-3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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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끝에 15일 오전 영면… 평생 민주화ㆍ통일ㆍ노동 운동에 매진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요구하며 5일째 오체투지 행진을 한 금속노조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연대단체 참가자들이 1월11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을 떠나 청와대로 향하는 마지막 오체투지 행진을 하다 광화문 교차로에서 경찰에 의해 들려 연행되는 모습을 보자 백기완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제공=통일문제연구소)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요구하며 5일째 오체투지 행진을 한 금속노조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연대단체 참가자들이 1월11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을 떠나 청와대로 향하는 마지막 오체투지 행진을 하다 광화문 교차로에서 경찰에 의해 들려 연행되는 모습을 보자 백기완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제공=통일문제연구소)

날짐승 중 으뜸이라는 장산곶 마을의 장수매, ‘장산곶매’. 황석영의 장산곶매는 마을을 지키곤 생을 다했지만, 백기완의 작품에선 하늘로 훨훨 날아 떠난다.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늘 투쟁의 현장에 앞자리를 지키고 섰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별세했다. ‘재야의 대부’를 자처하던 그는 장산곶매처럼 하늘을 품으러 떠났을까. ‘산자여 따르라’던 그의 외침만이 남아 정계도 슬픔에 빠졌다.

서울대병원 등에 따르면 백 소장은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이어오던 중 이날 오전 영면했다.

백 소장은 지난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농민·빈 민·통일·민주화운동 등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다.

국민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백 소장은 시, 소설 등 문학 작품을 읽고, 영어사전을 모두 외우는 등 독학으로 학업에 매진했다. 이후 분단으로 여덟 식구가 흩어지는 상황에 이르자 갈라진 집안을 하나로 잇기 위해 통일 문제 등에 대해 고민하고 인식을 넓혔다.

백 소장은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이끌던 중 1960년 4·19혁명에 참여했고, 1964년 함석헌, 장준하, 계훈제, 변영태 등 재야 운동가들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다.

백 소장은 여러 사회 운동을 주도하다 끊임없이 고문과 투옥 생활을 지내야 했다. 지난 1974년 유신 반대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한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이후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옥고를 치른 바 있다.

1987년 대선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해왔다.

▲2019년 2월 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故 김용균 노동자의 영결식. (사진제공=통일문제연구소)
▲2019년 2월 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故 김용균 노동자의 영결식. (사진제공=통일문제연구소)

‘영원한 청년’ 백기완 소장의 다양한 사회 참여는 최근까지도 계속됐다.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용산참사 투쟁, 이명박 정권퇴진운동을 비롯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광화문 촛불집회에는 23차례 모두 참여했다.

백 소장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다. ‘항일민족론’(1971),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1979),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두 어른’(2017) 등 다수의 저작도 남겼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백미담, 백현담, 아들 백일씨가 있다.

백 소장의 딸인 백원담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늘 든든한 진보운동의 지향을 몸소 실천으로 열어주셔서 고맙다”고 전했다. 그는 “역사적 긴장을 살라시던 당신의 담금질과 깊은 사랑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힘겨운 투병생활 속에서도 해가 질 무렵이면 인왕산 자락의 노을을 한없이 바라보시던 맑은 눈빛, 평안히 가시라고 보내드려야 하는데 지난 세월을 돌이키니 어찌 보내드릴 수 있을지.. ”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아울러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1979년 주신 딸에게 주는 편지를 책으로 엮어 평생을 살아가는 길라잡이를 일러주신 아버님”이라며 “62해 동안 아버님과 맏딸로, 사회운동의 선후배로, 끊임없는 긴장의 일상이 쉽지 않았지만 더없이 빛나고 참으로 벅찬 세월이었다”고 덧붙였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모습. (사진제공=통일문제연구소)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모습. (사진제공=통일문제연구소)

비보를 접한 여야 정당들도 고인을 애도했다.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영원한 민중의 벗, 백 선생님은 우리를 떠났지만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며 “더불어민주당은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 모두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은혜 국민의힘 대변인은 구두논평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큰 어른인 고(故) 백기완 선생님을 추모하며 유가족께도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다.

김 대변인은 "고인은 모진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한 평생 오로지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국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셨다"면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등한 세상 또한 고인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평했다.

이어 “진정한 진보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지금도 ‘어영차 지고 일어나는 대지의 싹’처럼 생명의 존엄,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일깨워주실 듯하다”며 “국민의힘은 국민이 주인되는, 더 나은 세상을 열망했던 고인의 뜻을 가슴깊이 되새기며 주어진 소명에 더욱 충실히 임하겠다”고 말했다.

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고인의 삶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민중운동의 역사 그 자체”라며 “애통한 마음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과 영면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이낙연 민주당 대표, 이재명 경기도지사, 심상정 정의당 의원, 양향자 민주당 최고위원, 박용진 민주당 의원, 강기정 전 청와대 수석 등 다수의 정계 인사들이 애도의 뜻을 표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 장지는 모란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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