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이태겸 감독 "바닥에 도달한 후에야 '긍정'이 고개를 들었다"

입력 2021-02-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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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감독 인터뷰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감독. (사진제공=영화사진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감독. (사진제공=영화사진진)
"우리는 가장 바닥에 도달했을 때 어떤 긍정성을 보일 수 있을까요?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고,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마음이 아니에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겠다는 게 긍정의 첫 마음입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연출한 이태겸 감독을 만나 제목의 의미를 묻자 이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다소 관념적일 수도 있는 이 제목은 이 감독에겐 현실이 오롯이 담긴 문장이었다.

"긍정하는 첫 마음은 우리가 씨를 뿌릴 때 씨와 같은 마음이에요. 없어지지 않아요. 머릿속으로 첫 마음을 꺼낸다고 되는 게 아니죠. 역경 후 생긴 긍정심은, 정말로 긍정하는 마음은 계속 남아요. 관객에게 묻고 싶어요. 당신은 바닥에 도달할 수 있을 때 독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7년간 근무했던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하청업체로 파견 명령을 받은 정은(유다인)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현장에서 버텨내는 이야기를 담는다.

이 감독은 실제 어느 사무직 중년여성이 지방 현장직으로 부당 파견되는 치욕을 겪고 버텨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를 보고 시나리오 영감을 받았다. 이 감독은 "감정이입이 훅 됐다"고 했다.

"'소년 감독' 이후 준비하던 영화들이 될 뻔하다가 안 되고 또 될 것 같다가 안 되는 게 반복됐어요. 저는 제가 그렇게 극심한 우울증을 겪을 줄 몰랐어요. 몇 년간 지속됐죠. 무섭더라고요. 삶의 의욕이 없어졌고, 밥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았어요. 기사를 보니 그분은 저보다 더 힘들 것 같았어요. 일단 글부터 써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이 감독은 더이상 영화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다른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렇다고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좋지 않은 상태를 어중간하게 끌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 감독은 "평생 어중간해질 것 같았다"며 힘들었던 당시를 회상했다.

"'견딜 수 있다'며 애써 즐거운 척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어요.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때 생각했죠. 밑바닥까지 가겠다고요. 바닥에 닿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거 같았죠. 어떤 상황일지라도 피하지 않고 부딪히면 바닥에 가고, 그럼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이 감독은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하면서 정은에 자신을 투영했다. 정은은 나아가 죽음의 문턱 앞에 놓인, 우리 사회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바닥을 마주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 감독은 사무직 여성 파견 이야기를 송전탑으로 옮겨왔다. 그는 송전탑을 인간이 만든 쇠로 된 거미줄이라고 봤다. 정은이 처한 절대 극복할 수 없는 현실과 송전탑을 연결한 것이다. 취재를 위해 송전탑을 마주한 이 감독은 '엄습'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다.

"'인간이 어떻게 이 높이까지 송전탑을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송전탑 앞에 서면 숨 몇 번 내뱉고 돌아가거나 다른 길을 찾죠. 하지만 엄청 높고 복잡한 이 구조를 오르는 사람이 있어요. 이 차가운 철골을 올라가는 게 정은의 삶이었던 거죠."

영화를 보면 곱씹게 되는 대사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사망보다 더 무서운 게 해고', '사는 게 알바예요', '철탑 무섭지만 내가 지켜야 할 딸이란 생각으로 오릅니다' 등의 대사들이다. 이 감독이 얼마만큼 '인간'에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저는 인물 설정에서 대사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죽음을 느끼며 일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요. 그들에게 죽음은 무엇일까요? 진짜 죽음을 걱정했다면 회사에 다니지 못했겠죠. 하지만 회사에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는 거죠. 어떤 이에겐 해고는 더 큰 두려움일 테니까요."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사진제공=영화사진진)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사진제공=영화사진진)

영화에서 두 명의 여성이 '이사, 우리랑 진짜 상관없는 직책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도 좋아하는 대사다. 구조적인 문제를 말할 수 있는 건 두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감독은 여성을 다 이해한다고 판단하지 않으려 했다.

"여성이 소중하게 쓰이는 직장도 많겠지만, 구조적으로 진급하기 힘든 곳도 상당히 많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여성을 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해라고 생각했어요. 자칫하면 영화가 제 편견 속에 갇힐 테니까요. 공동작가인 김자언 작가가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덕분에 섬세하고 정서적인 부분을 표현할 수 있었죠. 여성의 정서를 온전히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내년 1월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경영책임자가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 벌금형을 받게 되고, 최대 5배의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회사가 책임지도록 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시행된다. 하지만 규정에 모호한 부분이 많이 있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나온다. 이 감독은 "죽음의 눈은 정치·경제적 이유를 따져 묻지 않는다"고 의견을 밝혔다.

"정치적 관점이 아닌 영화를 수행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의 눈'은 위험한 상황에서 밝아지기 마련이에요. 유예 기간을 가리지 않죠. 상황이 좋지 않으면 언제나 찾아온다는 생각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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