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이번이 처음이겠습니까? 그동안 안 드러나서 그렇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수십 년을 기다려 이제야 개발되나 했더니 또다시 연기되고 무산될 위기에 분노만 치밉니다.”
4일 만난 경기 시흥시 과림동 한 주민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사건을 두고 울분을 참지 못하겠며 이렇게 말했다.
이에 앞서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지난 2일 “LH 직원 여러 명이 3기 신도시 지정 전 토지를 매입한 정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3일에는 국토교통부가 자체 조사에 나서 “LH 직원 13명이 신도시로 지정된 지역 12개 필지를 사들인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주민들 “LH 땅 투기에 수십년 기다린 개발 무산 위기” 울분
시흥시 괴림동을 포함해 이번에 3기 신도시로 선정된 광명‧시흥지구 일대 주민들은 LH 직원들의 땅 투기 사건으로 공분하고 있었다. 정부의 부동산 개발 정책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의 도덕적 해이와 비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넘어 이들에게는 주거권이 달린 문제라는 인식이 강했다.
김세정 시흥‧광명 신도시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은 “이곳이 일찌감치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지정됐다가 해제됐고 이후에도 신도시 지정이 안 되다가 이제야 됐는데 LH 사건이 터졌다”며 “이번 일로 사업이 당초 계획보다 연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올해 64세인 그는 해군 장교로 복무한 시기를 제외하고 평생을 시흥에서 산 토박이라고 한다. 예편 후 지역 발전을 위해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정부에 건의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원주민들의 숙원이 드디어 이뤄지려는데 이번 일로 다시 무산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면서 “조금 더 늦어지더라도 광역교통망 확충과 스마트시티 조성 등이 제대로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흥과 광명시의 거리 곳곳에는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는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다. 내용은 ‘주민재산 강탈하는 강제수용 반대’, ‘원주민 쫓아내는 국토부장관 퇴진’, ‘구로차량기지 광명이전 결사반대’ 등이다.
6번째 3기 신도시 지정으로 힘겹게 모아졌던 주민들의 의견은 다시 사분오열하며 갈등을 키우는 중이다. 정부 계획대로 가자는 측과 환지 개발을 주장하는 측이 맞부딪힌 가운데, 이번 LH 건으로 신도시를 포기하고 현재를 유지하자는 의견도 커지고 있다.
시흥시 무지내동 J부동산 관계자는 “이곳에서 계속 산 어르신들 위주로 지금 이대로 사는 게 낫다는 원주민이 늘고 있다”며 “토지보상을 받아도 양도소득세를 떼고 나면 다른 곳에 정착해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도시 지정 2달 전 콘크리트 땅에 흙 쌓고…발표 이틀 후 식재”
기자는 이날 LH 직원들이 광명ㆍ시흥신도시 지정에 매입한 시흥시 과림동 땅도 둘러봤다. 기계부품 제조공장과 물류창고 단지가 밀집한 지역에 덩그러니 어색하게 흙으로 덮인 부지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보니 작은 향나무 묘목들이 빼곡하게 빈틈없이 심겨 있었다.
인근 공장 관계자는 “여기는 원래 빈 콘크리트 땅이었는데 2달 전 사람들이 트럭으로 흙을 가뜩 싣고 와서 쏟아 부었다”며 “그리곤 신도시 지정 발표 이틀 후에 다시 와서 묘목을 잔뜩 심어놓고 갔다”고 전했다.
그는 “콘크리트 땅 위에 흙을 덮고 심은 거라 나무가 자랄 수도 없다. 주변에서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다”면서 “이후에 뉴스를 보고 이유를 알게 되면서 기가 찼다”고 덧붙였다. LH 직원들의 치밀하게 계산된 투기 행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주변 주민들은 “이곳이 언젠가 개발될 것이란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계속 지연됐기 때문에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며 “신도시 발표 직전에 흙을 덮은 건 미리 알고 계획적으로 했다는 얘기”라고 입을 모았다.
또 다른 땅은 폐기물 처리업체가 밀집한 지역에 있었다. 폐수로 오염된 하천 바로 옆에 방치된 모습이었다. 원래 논이었던 땅을 2년 전 갈아엎고 밭으로 만들어 버드나무를 가득 심었다는 게 인근 주민들의 설명이다.
논은 분할 소유가 안 되지만 밭은 가능하기 때문에 이른바 지분 ‘쪼개기’를 위해 토지 종류를 답(畓)에서 전(田)으로 변경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가 심겨 있는 땅은 나무를 따로 감정해 토지 보상가에 더해진다. 이곳의 토지면적 3.3㎡당 시세는 2018년 당시 130만 원대에서 현재 180만 원대로 형성돼 있다.
이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었다는 60대 안 모씨는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고향을 떠나게 생겼는데, 강제수용을 담당하는 공직자들이 이를 악용해 막대한 이익을 노렸다는 점이 참을 수 없이 화난다”고 분통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