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크래커] “그 놈의 ‘익명’ 때문에”…블라인드에 속타는 기업들

입력 2021-03-10 17:48 수정 2021-03-27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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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동아제약·KBS 등 블라인드 익명 게시판에 ‘막말 조롱글’ 논란
“익명 무기로 편향된 주장 확산” vs “정보교류의 장…긍정적 효과”

▲공공주택지구 전국연대 대책협의회 회원들이 10일 오후 경기 시흥시 과림동 LH 한국토지주택공사 임직원 투기 의혹 토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3기 신도시, 공공주택지구 전면 백지화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공공주택지구 전국연대 대책협의회 회원들이 10일 오후 경기 시흥시 과림동 LH 한국토지주택공사 임직원 투기 의혹 토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3기 신도시, 공공주택지구 전면 백지화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LH 직원들이라고 부동산 투자하지 말라는 법 있나요?”
“니들이 암만 열폭해도 차명으로 투기하면서 정년까지 다니련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3기 신도시 땅투기 의혹’이 제기된 이후 ‘블라인드’에 올라온 내용이다. 투기 의혹만으로도 논란을 사기에 충분한 상황에서 LH직원들의 이같은

'망언' 전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직장인 익명 애플리케이션인 ‘블라인드’는 할 말 많은 직장인들의 ‘대나무 숲’으로 통한다. 사내 이메일을 통해 소속 인증만 하면 나이, 직급, 직종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속앓이’ 중이다. 일부 직원들이 쏟아낸 '필터' 없는 의견들로 기업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 사회적 논란까지 불러일으키고 있어서다.

(사진제공=KBS)
(사진제공=KBS)

익명 앱 ‘블라인드’에 내부 문제 거론되며 확대되는 양상

지난 2일 LH 직원들의 ‘광명·시흥 신도시 땅투기 의혹’이 제기된 이후 국민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의혹 제기 직후부터 블라인드에 올라오는 ‘옹호성 댓글’ 때문이다.

직원들의 땅투기에 대해 옹호하는 발언을 갈무리한 게시글은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저걸 쉴드치냐”, “토나온다” 등 비난부터 “누가 개발해도 될 곳이었다”는 말까지 다양한 반응이 쏟아져 나오며, 블라인드 공공기관 라운지를 넘어 갈등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기업 입장에서 조용히 지나가고 싶은 이슈가 블라인드를 통해 외부로 퍼져나간 일은 비단 LH만의 경우는 아니다.

최근 ‘성차별 면접’ 논란에 빠른 대응을 했던 동아제약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시작은 최호진 동아제약 사장이 출연한 유튜브 예능 프로그램에 한 댓글이 달리면서부터다. 글쓴이는 “면접 볼 때 인사팀 팀장이 유일한 여자 면접자였던 내게 ‘여자들은 군대 안 가니 남자보다 월급 적게 받는 것에 동의하냐’고 물었다”고 주장했고, 해당 댓글을 목격한 이들은 ‘동아제약 인사팀장의 성 차별적 면접 질문’에 분노했다.

동아제약은 즉시 반응했다. 최호진 사장이 직접 사과문을 발표하고, 성차별적 질문을 한 인사팀장에 대해 보직 해임과 정직 3개월 처분을 내렸다.

동아제약의 속전속결 행동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재점화되고 있다. 동아제약 블라인드 게시판에는 문제 제기자를 지적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면접관만 잘못 걸려서 불쌍”, “서류에서 걸러내지 못한 인사팀 잘못”, “페미니스트네” 등과 같은 반성 없는 조롱에 파장이 커지고 있다.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고 있는 KBS도 논란의 중심에 섰다.

KBS 구성원으로 추정되는 작성자는 ‘우리 회사에 불만이 많다’는 글을 통해 “너네가 아무리 뭐라 해도 우리 회사 정년은 보장되고요. 수신료는 전기요금 포함돼서 꼬박꼬박 내야 한다”면서 “밖에서 우리 직원들 욕하지 마시고 능력 되시면 우리 사우님 되세요”라며 비꼬았다.

해당 글은 현재 삭제된 상태지만, 갈무리된 이미지가 퍼지면서 “KBS 수신료 없애야 한다”, “그동안 낸 수신료 돌려달라” 같은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여론을 악화시키기 위한 게 아니냐”며 의심하기도 한다.

▲9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LH 직원으로 추정되는 글쓴이가 ‘내부에서는 신경도 안씀’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올려 논란이 됐다. 글쓴이는 “털어봐야 차명으로 해놨는데 어떻게 찾을 거”냐며 정부의 진상조사를 비웃었다. (출처=블라인드 캡처)
▲9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LH 직원으로 추정되는 글쓴이가 ‘내부에서는 신경도 안씀’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올려 논란이 됐다. 글쓴이는 “털어봐야 차명으로 해놨는데 어떻게 찾을 거”냐며 정부의 진상조사를 비웃었다. (출처=블라인드 캡처)

“일부 편향된 의견 도드라져” vs “…자유로운 소통의 장”

블라인드는 가입할 때 회사 이메일을 통해 소속을 인증하는 절차를 거친다. 이 때문에 익명 게시판에서의 글 작성자는 알 수 없지만, 회사 직원임은 확인할 수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블라인드에 대해 언급하면 그 말 자체가 블라인드로 올라가는 상황”이라면서도 “그렇다고 제재를 할 수도 없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도 “일부 직원들의 편향된 의견인데, 회사 전체의 입장으로 받아들인다”면서 “건전한 토론의 장이라는 취지와 달리 최근에는 변질됐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밝혔다.

익명성을 무기로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개인의 입장만 주장하는 게시글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주장이다.

물론 긍정적인 의견도 있다. 누구나 평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한 증권사 직원은 “다른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제한적이나마 소통을 할 수 있어 좋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내에서 부당한 일을 당한 피해자들에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통창구가 되기도 한다. 최근 카카오에서는 일부 직원들이 인사평가 방식에 대한 불만과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호소하는 길이 되기도 했다. 한 직원은 “회사에 익명신고센터가 있지만,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블라인드에 올렸다”고 했다.

다양한 이들과 교류할 수 있고, 누구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블라인드.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으니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다는 순기능과 아무말이나 뱉어내는 역기능의 사이에서 ‘중심잡기’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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