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유혈분쟁을 한마디로 정리한 것이다. 이 유혈분쟁은 1969년 8월 영국군이 북아일랜드에 주둔하면서 시작됐다. 1922년 독립전쟁을 치르고 아일랜드는 영국에서 독립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영국령이던 북아일랜드에서는 친영파이며 신교로 구성된 정당만 참여해 경찰과 교육 등에서 자치권을 행사했다. 경찰은 거의 대부분 영국인으로만 충원됐고, 비상법이 시행돼 가톨릭 교도인 아일랜드인들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1800년 유혈진압 후 연합왕국 영국에 통합된 아일랜드인은 계속해서 2류 국민으로 남았다. 영국은 인권선진국이라고 알려졌으나, 일부 진보 지식인들은 북아일랜드를 숨기고 싶지만 잘 알려진 ‘더러운 비밀’로 여겼다.
1998년 평화협정까지 30년 유혈분쟁
이곳에서는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해 남쪽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기치로 내건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영국군 주둔 때부터 결성됐다. 반대로 친영파는 자경단을 조직해 가톨릭이며 독립을 주창하는 주민에 대해 테러를 자행했다.
1998년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북아일랜드는 신교도로 구성된 친영파와 구교 아일랜드인 간의 피 흘리는 싸움이 계속됐다. 그런데 이처럼 아주 어렵게 성사된 북아일랜드 평화가 자칫 깨질 위험에 처했다. 영국이 유럽연합(EU)으로부터 탈퇴(브렉시트)하면서 북아일랜드가 아일랜드와 통일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진다.
브렉시트 후 식료품 부족 어려움
1월 중순 테스코와 세인즈버리 등 영국의 5대 슈퍼마켓 최고경영자들은 정부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북아일랜드로 식료품 운송이 어렵다며 대책을 요구한 것. 같은 영국 영토 안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은 브렉시트 때문이다.
영국은 올해 1월 1일부터 브렉시트로 ‘독립 국가’가 됐다. EU 회원국이었을 때 영국은 EU 국가로 수출입할 때 아무런 통관 절차가 필요없었다. EU 회원국 간에 단일시장이어서 우리가 충남에서 강원도로 물건을 팔 때와 같았다. 그런데 브렉시트 후에는 당연히 통관절차가 도입됐다.
다만 북아일랜드는 특수성을 감안해 EU의 단일시장에 잔류하기로 영국과 EU가 합의했다. 따라서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와 같은 영국의 다른 지역에서 북아일랜드로 식료품을 보내면 북아일랜드 항구에서 통관을 거쳐야 한다. 비회원국 상품이 EU의 단일시장인 북아일랜드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전에 없던 서류작업은 물론이고 위생검역 등 까다로운 절차가 도입됐다. 영국과 EU는 지난해 12월 말에 겨우 브렉시트 후 양자관계를 규정한 무역협력협정을 타결했다.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권을 우선한 영국이 이 협정을 체결했다.
통관 간소화 연장, 英·EU간 갈등
양측은 이런 사정을 감안해 이달 31일까지 북아일랜드로 오는 통관을 간소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통관에서 정보시스템(IT)이나 인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북아일랜드로 물건을 파는 영국 다른 지역의 업자들도 마찬가지다. 급기야 영국은 원래 3개월이던 통관 간소화 기간을 2년 더 연장해 달라고 EU에 요청했다. EU가 수용하지 않자 영국은 4일 이를 10월 말까지 일방적으로 연장했다. EU는 상호합의를 규정한 탈퇴협정 위반이라며 법적 절차를 개시했다.
영국이 북아일랜드만을 EU 단일시장에 잔류하게 한 것은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북아일랜드마저 단일시장에서 탈퇴하면 당장 남쪽의 아일랜드와 국경통제가 다시 필요하다. 하루에 최소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남쪽의 아일랜드와 북쪽의 북아일랜드를 오가며 일한다. 만약에 이곳에 국경통제가 재도입되면 1998년 평화협정 이전의 평화 교란 행위가 우려된다. 이곳 주민들은 검문소는 물론이고 카메라나 다른 감시장비를 통한 국경 통제조차 반대한다. 친영파인 신교도들조차 과반이 국경통제 재도입에 반대한다. 가톨릭이며 아일랜드인의 경우에는 거의 70%가 자유 통행을 찬성한다.
주민투표로 아일랜드와 통일 가능성
북아일랜드에서 경제는 EU 시스템, 정치는 자치정부. 이런 괴리는 지속된다. 국경통제 재도입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북아일랜드는 계속해서 경제 분야에서는 EU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1998년의 평화협정은 이곳의 미래를 주민투표에 맡긴다고 규정했다. 당시에는 친영파인 개신교의 비율이 55% 남짓했다. 201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비율은 48%로 하락했고 가톨릭의 비율은 45%로 급증했다. 즉 몇 년 안에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원하는 가톨릭 신자 비율이 연합왕국 잔류를 원하는 개신교와 엇비슷하거나 더 많아질 듯하다.
이런 인구통계학적인 변화에 더해 브렉시트는 이곳에서도 정치적인 변화를 야기했다. 친영파 정당인 민주연합당은 북아일랜드를 EU의 단일시장에 잔류하게 한 조항이 연합왕국 법을 위반한다며 보수당 의원과 힘을 합쳐 대법원에 위헌법률 심판을 청구했다.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원하는 아일랜드계 주민들은 은근히 기뻐하고 있다. 친영파 정당의 이런 조치가 오히려 역효과를 내서 아일랜드와의 통일이 앞당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느긋한 아일랜드, 미래를 위한 투자
실제로 아일랜드 정부는 북아일랜드 대학생들에게 EU회원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학비를 지원해 준다.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EU 회원국 대학생들이 다른 회원국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학점을 상호인정받을 수 있게 해준다. 브렉시트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북아일랜드 학생들은 이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아일랜드 정부는 통일을 준비한다며 이를 ‘미래를 위한 투자’로 부르며 올해부터 지원을 시작했다.
정치학자들은 앞으로 10~20년 안에 북아일랜드에서 주민투표가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0년이 지나면 가톨릭 신자의 비율은 더 높아져 절반을 넘을 듯하다. 그만큼 아일랜드 섬이 하나로 통일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진다.
평화보장자 EU 역할 더 커질 듯
1998년 북아일랜드평화협정(부활절 직전 금요일에 체결되어 굿프라이데이협정이라고도 불림)은 당시 미국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 치적이다. 조지 미첼 민주당 상원의원이 북아일랜드의 각 정파를 중재하고 영국 및 아일랜드 정부와 협의해 유혈 사태를 끝냈다. EU는 이런 협정을 적극 지지하고 영국과 아일랜드에 지속적인 대화의 장을 제공했다. 1973년 당시 유럽경제공동체(EEC) 회원국이 된 두 나라는 ‘유럽’ 안에서 자주 만나 논의하며 신뢰를 쌓아 나갔다. EU는 이런 이유로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간에 국경통제 재도입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정책을 전폭 지지했다. 평화보장자로서 EU의 역할이 돋보인다. 앞으로 영국과 EU는 이 문제를 두고 계속해서 대화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평화보장자로서 EU의 입장은 변화가 없고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