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정주영 20주기] 아산이 손수 일군 기업, 한국의 기둥이 되다

입력 2021-03-15 06:00 수정 2021-03-1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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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인수합병 대신 '창업' 강조…현대차그룹ㆍ현대중공업그룹 등 재계 대표 기업으로 성장

(사진=아산 정주영 닷컴 / 그래픽=이투데이)
(사진=아산 정주영 닷컴 / 그래픽=이투데이)

“기업을 인수하는 건 남의 불행을 발판 삼아 이득을 취하는 것 같아 싫다.
어떤 업종을 해보고 싶으면 내가 창업을 하면 된다.”

▲1970년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아산.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1970년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아산.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자서전에 남긴 말이다. 인수합병(M&A)은 기업이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경영 기법이지만, 정 회장은 제철처럼 정권의 요구가 있던 사업을 제외하고 모든 회사를 손수 처음부터 일궜다.

정 회장이 키운 기업은 지금도 대한민국 재계 곳곳에 남아 성장하고 있다. 아들이 이어받은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현대그룹, 현대해상을 비롯해 동생이 경영한 HDC그룹, 한라그룹, KCC그룹까지 한국의 모든 산업군에 정 회장의 손길이 닿아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 현대가(家)
▲범 현대가(家)

건설ㆍ자동차 품은 현대차그룹, 현대그룹 적통 잇다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선 아산. 그의 주도로 건설된 국토의 대동맥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토대가 됐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선 아산. 그의 주도로 건설된 국토의 대동맥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토대가 됐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정 회장은 풍전엿공장(현 오리온), 쌀가게 등을 오가며 돈을 모아 1946년 서울시 중구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자동차 수리 공장을 세웠는데 이게 ‘현대(現代)’의 시작이었다.

미군 일감을 수주하며 자동차 수리업은 날로 번창했지만, 정 회장은 건설업이 한 번에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을 깨닫고 1947년 현대토건(현대건설)을 세운다. 건설은 현대그룹의 핵심 사업으로 자리 잡는다.

현대건설은 고령교, 한강 인도교, 태국 고속도로,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등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굵직한 공사를 성공시키며 성장했다. 한때 중동의 대금 문제로 워크아웃 사태를 거쳤지만, 현대차그룹에 인수된 뒤 지금은 국내 5대 건설사로 자리하고 있다.

▲1985년 포니엑셀 신차발표회에 참석한 아산.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1985년 포니엑셀 신차발표회에 참석한 아산.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건설만큼 정 회장이 특별히 생각한 사업은 자동차다. 정 회장은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國旗)’다. 우리 자동차가 수출되는 곳에서는 자동차를 자력으로 생산, 수출할 수 있는 나라라는 이미지 덕분에 다른 상품도 높이 평가받기 때문”이라며 “머지않아 한국의 자동차가 세계 시장을 휩쓰는 날이 온다고 확신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정 회장은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급성장할 것으로 생각하며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뒤 동생 정세영에게 자동차 생산을 맡긴다. 현대차는 미국 포드와 기술 제휴로 ‘코티나’를 처음 생산했고, 1976년에는 첫 독자생산 모델 ‘포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포니는 한국에서 처음 수출된 자동차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후 현대차는 쏘나타를 비롯해 한국을 대표하는 차를 생산했고, 자체 엔진 개발 능력까지 갖추며 한국의 최대 자동차 제조사로 성장했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자동차(현대차ㆍ기아), 건설(현대건설ㆍ현대엔지니어링), 철강(현대제철ㆍ현대비앤지스틸), 부품(현대모비스ㆍ현대위아ㆍ현대트랜시스ㆍ현대오트론), 금융(현대캐피탈ㆍ현대카드ㆍ현대차증권), 현대글로비스, 현대로템, 이노션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2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정 회장의 2남 정몽구 회장이 그룹을 이끌다 정의선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며 3세 경영이 본격화했다.

‘조선 신화’ 계승한 현대중공업그룹

▲1974년 6월 현대울산조선소 준공식. 26만 톤급 유조선 7301 애틀랜틱 배론(Atlantic Baron)호와 7302 애틀랜틱 배론니스(Atlantic Baroness)호의 명명식이 함께 거행됐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1974년 6월 현대울산조선소 준공식. 26만 톤급 유조선 7301 애틀랜틱 배론(Atlantic Baron)호와 7302 애틀랜틱 배론니스(Atlantic Baroness)호의 명명식이 함께 거행됐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정 회장은 1960년대 초반부터 조선업에 관심을 가졌다. 위험이 큰 업종이지만,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고 연관 산업도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국가의 여력이나 현대의 형편상 조선은 쉽게 뛰어들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그러던 중 정부는 현대에 조선소 건설을 권유했다. 처음엔 고사하던 정 회장도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권유를 이기진 못했다. 1970년 3월, 현대건설에 조선사업부가 만들어졌다. 현대중공업의 모체다.

정 회장은 영국 A&P 애플도어, 스코트 리스고우 조선사와 기술 협력 계약을 맺은 뒤 차관 도입을 위해 세계를 누볐다. 아직 조선소도 짓지 않은 상태에서 정 회장은 선주를 설득해 유조선 2척 계약을 따냈다.

8000만 달러라는 자금을 투입해 조선소를 건설하며 동시에 선박을 만드는 세계 최초의 작업이 벌어졌다. 1974년 조선소 준공식과 선박을 선주에게 넘기는 명명식이 같은 날 이뤄졌고, 현대조선은 1975년 세계 최대의 선박 제조 능력을 갖춘 조선소가 됐다. 이후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해 한국조선해양으로 거듭나며 세계 시장 점유율 20%를 확보한 대형 조선사로 성장했다.

6남 정몽준이 이끌던 현대중공업그룹은 조선(한국조선해양), 기계(현대로보틱스ㆍ현대일렉트릭ㆍ현대건설기계), 정유(현대오일뱅크), 사회공헌(아산사회복지재단ㆍ아산병원ㆍ울산대ㆍ아산정책연구원) 사업군을 갖추며 재계 9위 그룹으로 자리 잡았다.

'자동차의 전자화' 내다본 아산…대북사업 포함하며 명맥 유지한 현대그룹

▲1998년 6월 16일 아산은 서산농장에서 키운 ‘통일소’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 분단 이후 정부관리의 동행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판문점을 통과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아산은 출발 전 ‘평화의 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번 방북이 개인의 고향 방문이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 화해와 평화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1998년 6월 16일 아산은 서산농장에서 키운 ‘통일소’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 분단 이후 정부관리의 동행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판문점을 통과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아산은 출발 전 ‘평화의 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번 방북이 개인의 고향 방문이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 화해와 평화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정주영 회장의 방북을 추진했다. 정 회장의 방북은 같은 해 6월 16일 실현됐다. 그는 서산농장에서 키운 소 500마리와 함께 북한으로 향했다. ‘정주영 소 떼 방북’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CNN을 비롯한 외신에 의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정 회장의 방북 이후 남북 교류는 확대됐다. 정 회장은 같은 해 11월 동해항에서 관광유람선인 현대금강호를 출항시켰다. 1999년에는 대북사업을 전담할 현대아산을 그룹에 설립했다. 이후 현대아산은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건설, 남북 경협 사업에 진출했다.

정 회장은 반도체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룹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중후장대 이외의 새로운 수출형 산업을 찾아야겠다고 판단하면서다. 특히, 정 회장은 '자동차의 전자화'를 전망했다. 그는 "자동차, 중공업, 건설을 하며 이 분야의 전자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라며 "특히 자동차의 전자화는 장차 자동차 산업의 성패를 가늠할 핵심 요소가 될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현대그룹은 1983년 현대전자를 출범하고 경기도 이천에 2800억 원을 들여 공장을 세운다. 1985년부터 메모리 반도체 양산을 시작했고, 1988년 1M D램 개발에 성공했다. 현대전자는 창사 5년 만에 46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흑자를 거뒀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반도체 사업에 한계를 느낀 현대는 현대전자에서 손을 뗀다. 하이닉스로 이름을 바꾼 현대전자는 2012년 매각 절차를 거쳐 오늘날의 SK하이닉스가 된다.

2000년에 이른바 '왕자의 난'을 겪으며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등이 현대그룹에서 분리돼 빠져나간다. 그룹에 남아있던 현대전자, 현대증권, 현대상선도 매각되며 현대그룹의 사세는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5남 정몽헌이 현대그룹을 이끌다 2003년 사후에는 부인 현정은 회장이 경영을 주도하고 있다. 지금은 현대엘리베이터, 현대무벡스, 현대아산, 현대경제연구원 등을 그룹 내에 두고 있다.

'유통 제국' 현대백화점그룹…'종합 금융사' 현대해상

▲정주영(가운데) 명예회장과 정몽근(맨 뒤쪽) 현대백화점 회장이 1985년 개점한 서울 압구정동 본점 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정주영(가운데) 명예회장과 정몽근(맨 뒤쪽) 현대백화점 회장이 1985년 개점한 서울 압구정동 본점 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현대그룹은 1971년 금강개발산업을 설립하며 서비스 사업에 처음 진출한다. 호텔, 백화점, 여행 등으로 사업군을 넓혔고, 3남 정몽근 회장의 주도로 1985년에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을 설립했다. 무역점 등으로 점포를 늘리며 최고급 백화점을 지향했고, 1999년 현대그룹에서 분리됐다.

현대백화점그룹으로 이름을 바꾼 뒤 현재는 유통(현대백화점ㆍ현대홈쇼핑), 종합식품(현대그린푸드), 토탈리빙(현대리바트), 패션(한섬), 뷰티 헬스(현대바이오랜드), 미디어(현대HCN), 렌탈(현대렌탈케어), B2B(현대드림투어) 등을 아우르는 재계 18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정몽근 회장에 이어 정지선 회장이 3세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1983년 현대그룹에 인수된 현대해상은 1999년 그룹에서 분리됐다. 이후 7남 정몽윤 회장이 경영을 이끌며 9개 계열사를 보유한 금융사로 성장했다.

정인영의 한라ㆍ정세영의 HDCㆍ정상영의 KCC

▲1988년 KCC 여주공장을 방문한 아산과 정상영.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1988년 KCC 여주공장을 방문한 아산과 정상영.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정주영 회장의 아들뿐 아니라 동생들도 오늘날 주요 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다. 둘째 동생 정인영은 1962년 현대양행과 만도기계를 설립해 기계와 자동차 부품 사업을 시작했다. 건설과 시멘트로 사업을 넓히는 와중에 신군부에 의해 현대양행을 억울하게 빼앗긴다.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을 거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재기에 성공해 현재는 자동차 부품(만도ㆍ만도헬라익렉트로닉스ㆍ만도브로제), 건설(한라), 교육(한라대) 사업을 거느리고 있다.

현대그룹은 1976년 현대건설 주택사업부가 독립하며 주택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오늘날 HDC그룹의 모태다. 1999년 정주영 회장의 넷째 동생 정세영 회장이 경영권을 넘겨받았고, 현재는 정몽규 회장이 2세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금융(HDC자산운용), 부동산(HDC현대산업개발ㆍHDC아이파크몰ㆍHDC신라면세점), 사회간접자본(서울춘천고속도로ㆍ아이파크마리나), 기술/첨단소재, 문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여섯째 동생 정상영은 1958년 건자재 사업을 위해 금강스레트공업을 설립했다. 이후 건설, 도료, 유리 사업에도 진출했고 2005년에는 회사 이름을 지금의 KCC로 바꾼다. 정상영 회장이 1월 30일 별세하며 현대 가문의 1세대 경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장남 정몽진, 차남 정몽익, 삼남 정몽열 회장이 각각 KCC, KCC건설, KCC글라스를 경영하게 됐다.

▲매일 새벽 아들들과 걸어서 출근하는 모습. 왼쪽부터 몽구, 몽윤, 아산, 몽준, 몽혁. 청운동 자택으로 찾아온 아들들과 아침식사를 같이 한 뒤, 걸어서 계동 사옥으로 출근하는 것이 관례였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매일 새벽 아들들과 걸어서 출근하는 모습. 왼쪽부터 몽구, 몽윤, 아산, 몽준, 몽혁. 청운동 자택으로 찾아온 아들들과 아침식사를 같이 한 뒤, 걸어서 계동 사옥으로 출근하는 것이 관례였다. (사진제공=아산 정주영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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