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국제법은 비준한 국가 간의 관계만을 규정한다. 즉 국제조약이나 협약 등은 비준되더라도 비준한 국가의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지닐 뿐 법적 위계구조에서 헌법보다 위에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비준한 국가의 시민이나 기업이 국제법 위반을 이유로 자국 정부를 제소하기는 매우 어렵다.
法해석 ECJ 의뢰않고 직접 ERF 제동
반면에 경제정치 블록 EU는 70년 정도 되는 통합 과정을 거치면서 단순한 국제기구와 다른 상당한 법적 통합도 이루어왔다. 각 회원국 법원이 재판 중에 EU법을 해석할 때에는 이를 유럽법원(유럽사법재판소, European Court of Justice, ECJ)에 의뢰한다. 유럽법원은 EU법 최종 해석권을 보유한다. ECJ가 연방법원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ECJ가 회원국 법원이 EU법을 서로 다르게 해석할 경우를 미연에 방지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 기본적인 통합의 틀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허물고 있다. 이 때문에 작년 7월 힘겹게 합의된 유럽경제회생기금(ERF) 운영이 상당 기간 차질이 불가피하다. 헌재의 이런 조치는 코로나19가 야기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는 EU의 노력을 저지한다.
“국제자금시장서 예산 조달 조약 위반”
지난달 26일 독일 헌재는 ERF 설립을 허용하는 법에 서명하지 말라고 독일 대통령에게 사실상 지시했다. 연방하원이 이 법을 비준했는데도 헌재는 판결에서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연방하원에 발의한 긴급 결의안을 우선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AfD와 한 시민단체는 ERF 설립이 유럽연합조약을 위반했다며 헌재에 소송을 제기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당연히 독일 헌재는 EU법 해석을 ECJ에 의뢰해야 한다. 이게 그동안 유럽통합이 이룩해 낸 성과이자 회원국 법원이 당연히 지켜야 하는 절차이다. 회원국 독일은 유럽통합을 주도해 왔다. 하지만 헌재가 버젓이 이런 절차를 위반했다.
AfD와 시민단체는 EU가 법치주의 준수를 핵심 가치로 여기는 기구인데, EU 예산을 국제자금시장에서 조달하는 것은 EU 조약 311조 위반이라며 헌재에 이를 가려 달라고 요청했다. 원래 EU 예산은 회원국 경제력에 비례하는 분담금과 EU의 공동정책에서 나오는 비회원국 수입품에 대한 수입관세 등에서 충당된다. 7500억 유로(우리 돈으로 1000조 원 정도)의 ERF는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 긴급 편성되었다. 행정부 역할을 하는 EU 집행위원회가 국제자금시장에서 이 돈을 조달하고 회원국들이 차차 분담금을 늘려 상환한다.
지난해 5월 27일 자 ‘유럽은 지금’ 칼럼에서 분석했듯이 ERF의 자금 조달은 유럽통합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예산 규모뿐만 아니라 집행위원회에 국제자금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게 권한을 준 건 매우 혁명적인 조치이다. 유럽통합을 저지하려는 AfD 등은 바로 이런 조치가 기존 EU조약을 위반했다며 결코 묵과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ERF 결정을 담은 EU 예산 수정법은 27개 회원국의 비준을 마쳐야 시행될 수 있다. 3월 말을 기준으로 16개 회원국이 비준을 마쳤고 나머지 국가들은 의회 승인을 진행 중이다. EU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ERF 자금의 약 20%를 부담한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지난해 5월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합의해 이런 제안을 냈고, 그해 7월 유럽이사회(EU 정상회담)에서 이를 관철시켰다. 하지만 독일 헌재가 이런 노력에 바로 찬물을 끼얹었다.
조약 위반 결정나면 ERF 설립 난관
헌재가 EU조약 위반이 아니라고 결정한다면 ERF 설립과 운영은 몇 달이 늦어도 진행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조약 위반이라고 결정이 난다면 ERF 설립은 큰 난관에 빠지게 된다.
원래 각 회원국들은 이달 말까지 ERF 자금 지원 집행계획을 제출한다. 이 계획은 3분의 1 정도는 친환경 정책을 포함해야 하고 경기 부양책을 담아야 한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를 검토해 승인하고 7월부터 ERF 지원이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헌재의 이번 판결로 이 절차가 최소 몇 달 늦춰지게 됐다.
1월 20일 취임한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1.9조 달러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시행 중이다. 또 2조 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책도 준비 중이다. 이런 부양책에 힘입어 미국 경제는 올해 6.5% 정도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에 EU는 미국 성장률의 절반을 약간 웃도는 3.7% 정도의 성장이 예상된다. 유럽 일부에서 미국처럼 대규모 경기 부양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합의된 ERF 시행조차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獨 헌재 잇단 돌출에 뾰족한 대책 없어
그렇다면 EU법을 위반하는 독일 헌재를 다룰 방법이 없을까? EU 집행위원회는 회원국의 EU법 위반 여부를 감독하고 위반했다고 판단할 경우 법적 절차를 개시한다. 먼저 회원국에 서면으로 위반 내용을 통지하고 회원국의 수정 조치를 기다린다. 여기에서 만족할 만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집행위는 유럽법원에 회원국을 제소한다. 기존 국제법은 법 집행을 감독하고 위반국을 제소하기가 쉽지 않다. 이 절차만 봐도 그만큼 유럽통합이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독일 헌재는 독립된 헌법기관이다. 독일 정부를 제소하고 독일 헌재가 EU조약을 위반했다고 ECJ가 판시해도 헌재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 헌재가 몇 차례 EU조약을 위반해도 집행위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독일에서 유럽통합을 반대하는 AfD나 시민단체는 이 점을 잘 알기에 헌재를 적극 활용해 왔다.
일부에서는 독일 헌재의 이런 판결을 긍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리 비상시라도 과연 ERF가 EU조약을 위반한 것인지를 의회의 비준 후라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것. 그러나 EU가 기존 국제법 질서와 다른 새로운 법적 질서를 구축해 왔다는 점, 그리고 회원국 모두가 이를 준수하는데 유독 독일에서만 이런 위반이 종종 있었다는 점, EU의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는 점은 아쉽다.
극우정당 ‘EU 흔들기’ 거세질 수도
어쨌든 ERF 집행은 상당 기간 차질이 불가피하다.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은 이런 틈을 놓치지 않을 듯하다. 반유럽과 반이슬람을 앞세운 이탈리아의 오성운동은 2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이끄는 통합정부에 참여했다. EU가 팬데믹 극복에 적극 나섰고 이탈리아가 ERF의 최대 수혜국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대했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극우 정당은 이를 공격하며 다시 EU 흔들기에 나설 것이다. 이럴 경우 EU 경제의 불확실성은 더 커진다. 그리고 이런 불확실성이 국제정치경제, 그리고 소규모 개방경제이기에 대외 환경에 취약한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불확실성에 대비가 필요하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